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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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 김홍한
  • 승인 2016.01.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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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예수님이 사랑한 사람들

하나님께서도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옛날 중국의 제자백가 중 兼愛(겸애)를 주장한 墨子가 있었다. 겸애란 차별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인데 언뜻 들으며 그럴 듯하지만 허황된 이야기다. 사람으로서는 공평한 사랑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편애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의인을 향하지 않는다. 물론 악인을 향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사랑하고픈 사람만 사랑하신다.

불공평하게 사랑하기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극도로 미워하셨다. 반면 대표적인 압제자라 할 수 있는 로마군인들에게도 관대하시고, 대표적인 착취자라 할 수 있는 세리들에게도 관대하셨다. 창녀들에게도 관대하셨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관대하셨다. 그들을 책망하거나 비난하시는 말씀이 성경에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고 칭찬하시는 말씀들뿐이다.

도대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기준이 무엇일까? 그분의 사랑 기준은 결코 선악에 있지 않다. 믿음에도 있지 않다. 그 분의 사랑은 언제나 약자를 향하신다.

약자에도 종류가 있다. 정치적 약자가 있고 경제적 약자가 있고 신체적 약자가 있고 종교적 약자가 있다. 종이나 노예들,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소경이나 귀머거리 같은 정치, 경제, 신체적인 약자들에 대한 배려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바가 있다. 문제는 종교적 약자들에 관한 것이다.

누가복음 19장 에는 돈 많은 세관장 자케오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케오 에게도 구원을 선포하셨다. 자케오는 세관장이니 정치적으로 강자다. 돈이 많으니 경제적으로도 강자다. 비록 키가 작았지만 나무위에 올라갈 수 있는 건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약자다. 종교적 약자다. 의인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사정없이 죄인으로 매도되는 종교적 약자, 그래서 예수님은 자케오 편을 들어 주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있다.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부자인지 어떤지는 관계없다. 그녀가 모든 사람들에게 죄인취급 당한다는 그것 하나로 그녀는 약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간음녀의 편을 들어 주셨다.

로마군대 백부장을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청을 들어 주셨다. 식민지 백성들에게 점령군 장교라니 결코 약자가 아니다. 조선 땅에 주둔한 일본헌병대 장교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는 강자다. 그러나 그도 역시 유대인들로부터 사정없이 죄인으로 매도되는 종교적 약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편을 들어 주셨다.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도 권력자가 있고 부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없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은 죄인 취급을 당하는 종교적 약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 편을 들어 주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사안에 따라서 옳고 그름이 뒤바뀐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뒤바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유익하면 선으로 여기고 나에게 해가 된다면 악으로 여긴다. 선과 악의 판단이 이러하니 오히려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내가 생각이 어리고 신앙이 어렸을 때는 나름대로 선과 악을 구별하려 하였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것이 헛갈린다.

예수님께는 선과 악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는데 어찌 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선악을 구별치 않으셨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이는 언제나 약자였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는 옳은 자 편에 설려고 하지 마시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지 마시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나는 옳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교만이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거침없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말고 약자 편에 서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강자와 약자가 갈등관계에 있을 때 약자가 오히려 옳지 못한 경우도 많이 있다. 강자들만의 횡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약자들의 파렴치한 횡포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 편에 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다.
위로부터 받은 말씀

나는 목수일로 호구지책을 삼는 목수다. 내가 가구를 만들면서 배우는 바가 있다. 문짝을 만들어 달 때는 긴장을 한다. 몸체와 문짝의 간격이 적당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간혹 사람들이 이런 저런 부족한 것을 지적하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형태 만들기에 급급한 실력으로 그들의 지적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적을 받아들일 만 할 때에야 비로소 그 지적이 귀에 들어온다. 孔子의 제자 자로는

“道를 들은 것을 능히 행하지 못하였으면 또 다른 가르침 받는 것을 두려워하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논어> 공야장 13장 - 고 했는데 그 말을 나는 목수일로 경험 하였다.

가구에 색을 칠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색칠 하는 것이 형태 만드는 것 보다 더 많은 정성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색칠을 하게 되니 아주 작은 흠까지도 다 드러난다.

가구를 만든지 6년 정도 되었다. 이제 조금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가구는 기술도 좋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성으로 만든다.” 정성을 얼마나 들이느냐가 가구의 값이 된다. 그런데 어디 가구뿐일까? 세상살이 모두가 그렇다. 정성이 들어간 만큼 가치가 있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어느 날 제나라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수레를 만드는 장인이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다가 환공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성인의 말씀이다’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벌써 돌아가셨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괘씸히 여겨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네가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한다면 용서해 주겠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마땅히 벌을 내리겠다.’ 수레장인이 말했다. ‘제가 수레바퀴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해서 안 됩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 없고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성인의 가르침도 그와 같을 것이니 그 핵심은 전해 줄 수 없는 것, 책에 기록된 것은 찌꺼기일 뿐입니다.’”
<장자> 천도편

역시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소잡는 백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손을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짓누르고,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에 따라 칼이 움직이는 대로 .... 문혜군은 감탄하며 “아 훌륭하구나. 기술도 어찌하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을까?” 백정이 말했다.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의 온전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정신으로 소를 대합니다.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작용만 남습니다. 살과 가죽, 살과 뼈 사이에는 커다란 틈새가 있습니다. 그 틈새에 칼을 넣으니 저절로 갈라집니다. 솜씨 좋은 백정은 1년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칼이 무디어지지 않습니다.”
백정의 말을 듣고 문혜군은 말했다. “훌륭하구나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 養生의 도를 터득했다.” - <장자> 양생주 -

기술의 정수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체득하는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나무의 종류, 성격, 연장다루는 법, 이런 저런 숫자 등일 뿐이다.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스스로가 체득해야 한다.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가르치고 싶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진리의 세계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진리는 위로부터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유대인들의 법정에 섰을 때에 그들이 한 말은 배워서 한 것이 아니다. 체득한 것도 아니다. 위로부터의 은혜가 있어서 한 말이었다. 그래서 사제와 사두개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도행전 4:13)

베드로와 요한뿐인가?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들이 그러하다. 배운 것이 아니요 체득한 것도 아니다. 하나같이 위로부터 은혜가 있어서 한 말이었다.
나도 그렇다. 어떤 때 나는 나도 모르는 말을 한다. 이야기 신학 49호(2011.1.1)에 이런 글을 썼다.

“김목사, 이야기 신학에 쓰는 글 말인데 … 당신 그 글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어?”

“책임질 수 없어요”

“그럼 그 글들이 거짓이란 말인가?”

“나는 말이오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글을 써요. 미친 듯이 써요. 그러니 그 글은 내 글이 아니오. 내 글이 아닌데 어떻게 책임져요?”

“……”

“형님은 형님이 설교하는 것 책임질 수 있어요?”

“……”

“책임질 수 있는 말은 설교가 아니오. 자기 말이지. 자기 말이 어떻게 설교일수 있소?”

목사는 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남의 말을 빌어서 하는 사람도 아니다. 위로부터 받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위로부터 받은 말이기에 책임질 수 없다. 언행일치 할 수 없고 지행합일 할 수도 없다.

모든 인간에게 주신 은혜

사람을 속이기도 어려운데 어찌 하늘을 속이겠는가? 어려운 일을 왜 굳이 하려 하는가? 하늘에 진실하고 사람에게 진실하고 사물에도 진실하면 그것이 참 사람의 모습이라 할 것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 자신에게 진실함이 전부다.

강력한 법집행으로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데 기틀을 세운 상앙이 말한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예법의 통제를 받으며, 현명한 자는 법을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법에 얽매인다.”

여기에 내가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간사하고 영악한 자는 법을 농간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수재들이 법을 공부하고 판사, 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정치인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법은 전가의 보도가 되어 세상을 농간한다. 그들은 상앙이 말한 것처럼 지혜로운 자도 아니고 현명한 자도 아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사악한 자들이다. 그들이 사악하다는 이유가 있다. 누가 보더라도 죄가 명백한데 그들 자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법망을 피하고 궤변으로 죄를 면한다. 그 뿐인가? 초등학생들도 판단할 수 있는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뻔뻔한 이들이 저들이다. 때로는 헌법까지도 무색하게 하는 이들이 저들이다. 딱 하나,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이렇게 법 밖에 있으면서 서민들에게는 촘촘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법으로 겁박한다. 법을 농간하는 저 귀족들에게 세상의 법망은 아무리 촘촘해도 그것은 거미줄처럼 귀찮을 뿐이지 옭아매지 못한다. 그러나 저들도 하늘 그물에는 걸린다. 틀림없이 걸린다. 하늘 그물은 엉성해서 어리석은 서민들은 다 빠져 나가는데 영악한 저들은 다 걸린다. 그래서 하늘그물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하늘의 그물은 코가 넓어 트여 있으되 빠져나가는 것이 없다.(天網恢恢 疏而不失)” (노자 75장)고 했다.

성현들의 말씀만 멋진 것이 아니다. 때로는 흉악한 범죄자의 말도 크게 공감되는 말이 있다. 1988년 10월 8일, 지강헌등 미결수 12명이 교도소 이감 중 탈주했다. 살벌한 군부독재 하에서 단순 절도범에 불과한 그들에게 내려진 형량은 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이었다. 탈주한 이들 중 지강헌 등 몇 명은 어느 집에서 은신하다 발각되어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때 그들은 TV 중계를 요구했고 그들의 이야기가 온 국민에게 알려졌다. 그들이 말했다.

“有錢無罪 無錢有罪(유전무죄 무전유죄)”

법은 당연히 공정해야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 법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일전에 말하기를 “법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고 했다. 법이 본래 그렇다. 법은 결코 정의롭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않다. 법은 강자가 만들고 강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강자들이 만든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有錢無罪 無錢有罪”가 적용되는 법을 깨뜨려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복음 10장)

예수께서 깨뜨리신 것은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로서의 질서다. 예수께서 주시는 칼은 전쟁을 위한 칼이 아니라 거짓을 베는 정의의 칼이다. 힘으로 만든 거짓 평화, 그것을 우리는 “로마의 평화”라고 한다.
깨뜨려야 할 것은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만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불평등하고 부당한 법들, 이를테면 노동법, 비정규직법, 채권과 채무에 관한 법, 법인세법, 소득세법, 재산세법등을 깨뜨려야 한다. 그런데 서민들은 그런 것 모른다. “법”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마땅히 지켜야 할 절대 규범으로 알고 감히 깨뜨릴 줄을 모른다. 그저 자신이 직면한 비참한 현실에 울부짖을 뿐이다.

나는 요즈음 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가 든다. 역사상 민이 주인된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너도 나도 다 민주주의 한다고 한다. 이것은 사기다. 소위 민주사회에서는 귀족과 같은 특권층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특권층의 책임도 없다. 모든 책임을 민에게 돌린다. 그래서 사기다.

이야기 신학 129호에 이런 글을 썼다.

민주주의는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들 지식인들이 왕에게 권력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
민초들은 그런 것 모른다.
민주화투쟁은 언제나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했다.
민초들은 언제나 생존투쟁을 한다.
권력을 나누어 달라는 민주화 투쟁과 살겠다는 생존투쟁은 많이 다르다.

매우 유감스런 말이지만 매일 매일 생존투쟁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소위 민주화 투쟁은 사치다. 국정교과서 문제, 한일 과거사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세월호 사건까지도 화나고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들이지만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며 소득의 상당부분을 월세로 내야 하는 이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내일 죽을 노인부터 어린애 까지, 재벌총수부터 신용불량자까지, 대통령에서부터 일용직 노동자까지, 법을 만드는 이부터 법의 저촉을 받는 이들 까지, 성직자도 무신론자도 사람이라면 꼭 지녀야 할 것이 있다. 비록 위로부터 받은 은혜는 없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에게 주신 은혜가 있으니 그것을 성실히 한다면 심판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부족한 이 사람의 생각으로 그것은 진실함이다.

“진실함이 하늘가는 길이다. 진실하고자 함이 사람가는 길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 중용 20장 -

작심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은 참 어렵다. 작심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선을 행함도 악을 행함도 저절로 되는 것, 선을 행하고자 하기 보다는 선한 마음을 기르는 것이 먼저다. 선한 마음을 기르면 선은 저절로 행해지는 것, 삶이 그냥 선이다. 선한 마음을 기르는 것, 역시 제 자신에게 진실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논어 읽기

子張 21장 子貢曰: 「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 人皆見之; 更也, 人皆仰之. 」
(자공 왈 “군자의 과오는 마치 일식, 월식과 같아서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이 즉각 알아본다. 또한 과오를 고치면 역시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한다.”)

과오가 있으면 사람들이 즉각 알아보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과오를 고치면 역시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한다는 말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군자의 과오가 드러나면 군자는 어떤 형태든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凡人에게는 충분히 용납될 수 있는 것도 군자에게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군자에게는 그만큼 도덕성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군자는 그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해서도 안 된다. 군자는 특권만큼이나 책임이 무겁기 때문이다.

군자의 과오는 돌이킬 수 없어서 두고두고 그의 멍에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과오를 끝까지 부인하고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 없다,”, “음모다”, “오해다” 하면서 극구 변명을 한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 이지만 그것 자체가 더욱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고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혹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더 이상 군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글쓴이 김홍한님은 대전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새교회> 목사

☎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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