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숨겨진 화서의 숭고한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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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숨겨진 화서의 숭고한 뜻
  • 류기석
  • 승인 2009.10.08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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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화서 이항로 생가에 깃든 희망의 봄!!!

북한강물을 따라 조심조심 올라가니 서종면이 나오고 조금 더 오르니 수입리 카페촌이 나오자 우측으로 명달리와 이항로 생가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로 한참을 들어서니 화야산의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벽계가 나왔다. 벽진(碧珍) 이씨 이항로의 생가는 전형적인 동 사택 배치로 좌측에서 흘러드는 물의 우측 파구가 보이지 않아 손꼽히는 길지다. 200년이 넘은 고택으로 풍수 하면 묘부터 떠올리는데 사실은 집이 먼저란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는 양평에서도 깊은 산골오지에 속한다. 이곳에서 화서 이항로 선생은 올곧은 한평생을 살다가 일제가 우리의 참된 역사를 묻어버리듯이 이곳에 조용히 묻혔다. 풍수는 사신사 즉, 용(龍)·혈(穴)·사(砂)·수(水)가 어찌 형성되고 물길은 어땠기에, 벼슬길도 마다하고 대쪽 같은 제자들만 양성하며 꼬장꼬장한 일생을 보냈는지 속히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는 어느 기자의 볼멘 기사가 언뜻 떠오른다. 그는 “인좌신향에 동사택 구조로 왼쪽의 안채를 ㄱ자로 배치하고 사랑채는 등을 댄 ㄷ자로, 해뜨는 방향을 택했다고 했다.”

▲ 위정척사론을 주창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구국지사로 길러낸 화서 선생의 생가는 깊은 산골에 있었다.

이항로 선생의 일생을 살펴보면 정조16년(1792)~고종5년(1868)의 조선후기 주자학자로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으신 분이다. 본관은 벽진(碧珍).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다.

그의 자료를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더불어 19세기 주리철학(主理哲學)의 3대가(三大家) 가운데 하나로,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맹자의 의리지사(義理之辭)·벽이단(闢異端), 주자의 노불변척(老佛辨斥)과 〈통감강목 通鑑綱目〉에 나타나 있는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대의(大義)를 의리정신의 맥락으로 삼아, 주자와 송시열을 존숭했다. 우주론에 있어서 〈주역〉의 계사전(繫辭傳)과 주돈이(周敦)의 〈태극도설 太極圖說〉에 근거하여 우주를 하나의 생명력 있는 유기체로 보아 자연적 생성법칙으로서의 존재원리와 함께 도덕적 주재원리를 자신의 우주론 속에 포괄시켰다.

이기론에 있어서 '이가 기보다 앞선다'(理先氣後), '이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다'(理尊氣卑), '이가 주인이고 기는 부려진다'(理主氣役)는 등의 주장을 통해 만물존재의 두 요소로서 설명되는 이와 기를 대등한 개념으로 볼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러한 인식의 태도는 이는 순선(純善)하지만 기는 불선(不善)을 겸하고 있으므로 이를 존중한다는 강한 가치관의 토대 위에 구축된 것이었다.

이기의 선후관계에 대해서도 그는 이선(理先)과 기선(氣先)의 양면을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는 객관적 태도를 전제하면서도 이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즉 이기의 존재는 항상 동시성을 갖고 있지만 가치론의 입장에서 이가 기의 원리가 되며, 근원적 실재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인식의 주체인 '심'(心)에 대해서도 심을 이로 보는 입장과 기로 규정하는 입장에 모두 반대하고, 이기를 동시에 포함한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했다.

▲ 화야산 청정한 기운이 감도는 벽진(碧珍) 이씨 이항로 생가는 200년이 넘은 고택이다


이와 같이 이를 중요시하는 그의 주리론은 외침의 위기가 고조되고, 기존의 가치관이 크게 동요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선을 지향하고 대의를 실천한다는 존왕양이의 춘추대의에 기초한 위정척사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입장에 바탕하여 그는 병인양요 당시 상소를 통해 "서양 적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쪽 사람의 말이요, 그들과 화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적 쪽 사람의 말이다"라고 하여 척화론-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는 한편, "적이 침범해오면 의병과 관군이 막아내어 왕실을 보호하고, 적이 물러가면 강상의 윤리를 밝혀 사교를 소멸시켜야 한다"라는 척사론(斥邪論)을 개진했다.

저서로는 〈화서집〉이 있으며, 편저로는 〈화동역사합편강목 華東歷史合編綱目〉·〈벽계아언 檗溪雅言〉·〈문인어록 門人語錄〉·〈주역석의 周易釋義〉·〈주자대전차의집보 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하였다.

문화관광부는 지난 2004년 3월의 문화인물로 조선후기의 성리학자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실천케 하여 국권을 지키게 했던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선생을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전개했다. 이에 따르면 이항로의 시대인식은 그의 보국양이(保國攘夷)와 위정척사에 기초하여 민족위기의식에서 구국활동으로 시작한 위정척사 상소운동과 화서학파 문인에게 강렬한 항일의병투쟁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게 방향을 제시하였다.

▲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에 위치한 노산사(蘆山祠)가 있던 자리이며, 현재 주자, 송시열, 이항로의 영정과 위패를 모셨는데 이항로(李恒老)가 태어난 집터이기도 하다.


이항로는 독학으로 스승 없이 사서 위주의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여 공, 맹, 정, 주와 송시열의 학문만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그 결과 존화양이, 위정척사 논리를 체득하였으며, 독자적인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주리론을 체계화시켰다.

조선왕조의 대외적 폐쇄성은 개항기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관념의 수준에 있어서는 명청교체기에 있어서 조선 주자학의 중화사상으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 현실인식이라 할 수 있는 보국양이가 정책으로서 주장된 것은 천주교 전래 이후 천주교가 사학으로 이단시되어 금교정책(禁敎政策)이 시행되면서부터이다. 이렇게 천주교를 이단시하는 금교적 입장 이외에 서구세력의 압력에 더욱 보국적이고 폐쇄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은 1860년대의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쳐 1876년 개항에 이르는 10년간이다.

원래 중화사상에서는 중국이 세계의 문화, 지리적 중심국이며, 조선은 중국의 변방이족인 동이(東夷)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중화문명의 정통계승자인 명나라가 멸망된 현실에서는 조선의 역사적 역할이 재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이항로는 중국관 속에서 중화문화를 계승한 정통적인 국가가 바로 조선이고, 따라서 조선조는 명조의 뒤를 이어 중화문화를 유지, 발전시켜야 할 역사적 임무가 있음을 논하고 있다. 그는 중화문화의 유일한 실질적 구현자로서 조선의 위치를 재정립시킨 것은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볼 때, 역사추진 과정에서 조선의 역할을 강조하려는 주체적 역사의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항로는 국가를 유지하는 데 최대관건은 민생이며, 민생을 괴롭히고 국고를 좀먹는 현상의 근본원인은 상부 지배계층의 무절제한 욕심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인식에서의 이항로의 정치사상은 위국적이고 위민적인 민본주의의 정치이념을 군주와 지배계층의 일차적인 국가적 과제로 보았던 것이다. 즉 백성의 생활안정을 위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이 보국안민임을 인식하여 지적하고 있다.

국왕을 비롯한 통치계급은 전연 흠이 없는 사람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므로 민사에 진력하는 통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항로사상에서 당연한 논리이다. 당대의 정치가 민심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던 그는 통치계급내의 여러 병폐를 혁신하는 행정원칙으로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건의하면서 국왕은 모든 사항의 시행여부를 늘 점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어진 사람을 두루 쓸 방책을 깊이 강구할 것,
② 번잡한 형식을 버리고 행정의 내실을 이룰 것,
③ 일체의 사적 요소를 제거할 것,
④ 널리 언로를 열고 직간을 받아들일 것,
⑤ 엄격한 상벌을 통해 기강을 세울 것.

이항로는, 백성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으면서, 민생을 위하여 당시의 부패상황을 지양할 것을 역설하였다. 또 백성들의 재물을 사취하는 관리들을 지적하면서, 민폐를 끼치고 국고를 좀먹는 현상의 근본원인이 상부계층의 무절제한 욕심 때문이라 하였다. 즉 부(富)가 편재된 사회는 병든 사회이며 백성의 부담을 공정하게 실현하는 것만이 개선방법이라고 농민의 수취체제 개혁을 인식하였다. 이항로는 다음과 같이 현실개선책을 건의하였다.

① 과도한 지출을 일체 금할 것,
② 백성의 근로봉사[賦役]를 즉각 중지할 것,
③ 병농을 일치시킬 것,
④ 탐관오리를 추방할 것,
⑤ 왕 및 궁실에서부터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일 것.

이항로의 보국양이와 위정척사의 국방사상은 서구열강의 도전에 대항하여 반서구적, 반침략적 성격을 보다 더 강화시켰고 ‘척사’의 대상은 ‘척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정책방향으로 국론을 통일하는 데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결국, 병인양요는 조선의 서양세력에 대한 적개심만을 고취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보국양이정책을 한층 더 강화하도록 하는 무의미한 침공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이항로는 서구열강들이 문화적 침투와 사회경제적 침략에서 실패하거나 배척당할 때 그들은 반드시 무력으로 대처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양적의 침략을 대비하여 비상 병농체제를 비롯한 각종 국방 방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무비무환론(武備無患論)을 역설하였다. 그렇게 해야만 국왕과 신민이 일치단결하여 모든 양적의 방어책이 확보된다고 보았다.

▲ 이항로 생가 옆 강당, 독학으로 스승 없이 사서 위주의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여 공,맹,정,주와 송시열의 학문만 집중적으로 탐구하였다. 그 결과 존화양이,위정척사 논리를 체득하였으며, 독자적인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주리론을 체계화시켰다.


이항로의 국가방위사상을 군사적 측면이나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자국방위력의 기본정책인 양병(養兵),양민(養民),양토(養土)6)의 삼양 부국자강책이 민생을 안정시키고 우리민족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내수외양을 주창한 논리는 뛰어난 견해였다. 그러므로 조정에 이러한 보국양이와 위정척사의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하였고, 특히 국방정책의 의지를 뒷받침한 것이 바로 이항로의 민족주의적 국방사상인 무비척양론과 양적방어론이었다.

이항로의 시대인식과 민족주의사상의 근원은 ‘춘추대의’에서 나온 존화양이, 위정척사사상의 의리정신이었다. 그의 애국애족사상과 민족자주의 대내외 현실대응 인식은 화서학파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외세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의식의 실천운동으로 발전하여 한말 항일의병운동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기의병운동에서 그 사상적 배경이 된 것이 이항로 계열이었으며, 또 실지 항일의병투쟁은 물론 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한 인물이 화서학파 계열에서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화서학파를 한국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세력으로 보는 데는 이의가 없다.

이항로는 외세인 일본세력의 침입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었다. 일본에 의한 개항 및 개화가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식민지화로 귀결됨으로써 이항로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예리하고 통찰력 있는 예언은 바로 적중하였던 것이다.

화서의 이러한 가르침은 현재 시대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 하다. 현재 우리는 정체를 거부하고, 새로워지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는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겪었던 19세기의 서양인들은 동양을 변하지 않는 정체된 민족이라고 깔보고 폄하 하였다. 20세기를 거쳐 21세기를 맞이하는 동안 우리는 그야말로 매일 매일이 새로워지는 속도(일일신日日新)에 죽고살았다.

여기서 우리의 종교도 예외일순 없어 시대 상황에 맞는 종교를 새롭게 받아 들였다. 상고시대부터 남북국(신라, 발해)시대까지 이어져온 선도를 버리고 고려는 불교로 바꿨다. 조선은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받아 명나라의 정신적인 계승을 이은 나라가 되었다고 이항로는 간파하고 있다. 대신 청나라가 고구려 등의 선도 정신을 잇는 형국으로 급변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500년간 지속되었던 유교를 기독교로 갈아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며칠전 대한예수교장로회 은혜공동체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한 도올 김용옥 교수는 "지구상에서 이렇게 끊임 없이 새로워지는 문명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정체를 싫어하는 한국사람들은 빠름 속에서 자동차와 인터넷, 핸드폰 등이 안겨주는 편리한 문명 속에 길들여져 그동안 쌓아왔던 전통과 문화 속에 내재된 정체성을 잃었다.

그와는 반대로 서구유럽은 지금, 왠만하면 변하지 않는 주의로 천천히 조화로운 삶을 위한 지속 가능한 경제사회의 패러다임을 선택, 단일의 목표를 위하여 EU(유럽연합)로 새롭게 단결했다. 이제는 우리도 이러한 흐름을 알아 무조건적인 변화와 개혁보다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하여 행동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요즘 사회경제적으로 통계학에 '엥겔 지수'라는 것이 회자되고 있다. 이것은 한 가정이나 사회 또는 국가의 생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전체 생계비 지출 총액에서 음식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따라서 엥겔 계수가 높을수록 후진국에 속한다. 말하자면 자기 소득 중에서 먹는 것에 쓰는 비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후진국에 가깝다. 반대로 그 비율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선진국으로 분류된다. 그만큼 여유 있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앙의 계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매일을 자신의 삶을 위하여 소비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을수록 그는 덜 경건한 사람이다. 반면에 예수님처럼 이웃과 나라를 위하고 나눔의 실천을 반복하는 행동이야말로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바른 경건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감미로운 성가가 흐르는 화려한 예배당이 아니라 생생하게 느껴지는 시험과 유혹의 현장에서 말이다. 내 욕심과 시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내 인기와 명예가 짓밝히려는 바로 그 현장에서 말이다.

바로 그 때 그곳에서 예수님을 좇아 하루만이 아니라 매일 매일을 그렇게 행동하는 경건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이항로 생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을상회가 있는데 이곳에는 인심좋은 주모 할머니가 옛 방식 그대로 막걸리를 빛고 있었다.

남양주와 양평은 지척이지만 주리철학의 대가였고 유림의 종장이었다는 화서 이항로 선생을 이제서야 대면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양택과 음택을 모두 이웃해 갖춘 화서 이항로 선생의 묘를 최근 들어(2004년 3월) 이장했다는데 광중이 물 속이어서 후손들을 안타깝게 했다는 후문도 있어 풍수는 외부적인 요인도 중요하지만 내부적인 마음이 중요함을 느꼈다.

화서의 생가를 둘러보고 난 뒤에 무엇보다도 흡족했던 것은 양평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막걸리 집이다. 이항로선생 생가 앞, 가게들에서 팔고 있는 막걸리는 환경성이 떨어지기에 실망을 하고는 그곳에서 3분쯤 떨어진 보건소 앞 노문리 마을상회(031-774-1564)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인정이 넘치는 주모 홍씨 할머니의 직접 담근 막걸리를 맛볼 수 있어 좋다. 더욱이 직접 빚어낸 두부로 찌개를 만들어 안주삼아 내오시기에 더욱 뜻 깊은 늦은 오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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