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녹두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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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녹두꽃!
  • 류기석
  • 승인 2009.10.08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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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민의 지도자 전봉준, 동학혁명 유적지 답사

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부안 변산반도를 둘러보고 가기로 하고는 전북 정읍나들목으로 빠져나왔다. 전북 부안군 백산면과 정읍시 인근을 지날 때 동학혁명 유적지의 이정표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고택을 보기 위해 차를 운전해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 전봉준 고택이 있는 마을 앞, 잘 정돈된 숲 속의 묘지공원

동학농민혁명 113돌을 맞는 2007년 새해, 반외세·반봉건을 외쳤던 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야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다니 다행이다.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현장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우연하게 아이들과 함께 부안을 찾다가 그 생생한 현장체험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인근에 백산봉기 터는 보지 못했으나 전봉준 장군의 묘소와 고택에 머물면서 동학혁명의 중심에 서서 민중을 이끌었던 청렴하고 기백이 넘치는 당시의 전봉준을 만나보는 듯하여 기뻤다. 백산봉기는 1894년 3월25일(음력) 각지의 농민군들이 고부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백산성에 집결해 혁명군의 모습을 갖추면서 전국 규모의 농민혁명으로 발전하는 출발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마을앞 짚가리 풍경이 이색적이다.
 
우연히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지도자 전봉준(1855~1895)고택의 이정표를 보고 찾아갔으나 그가 살던 고택은 여느 고택과는 달리 초라한 시골 초가집이라 더욱 숙연한마음이 들었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남향으로 터를 잡고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 등을 지내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31년(1894)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거두는 등 농민에게 각종 수탈을 자행했기에 분노에 찬 농민 천여 명이 봉기하여 고부관아를 공격 조병갑의 잘못을 응징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불씨를 당기는 서막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봉준은 농민대중의 밑으로부터의 힘을 결집하여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동시에 한국에 침투해 들어오는 일본의 자본주의적 진출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의 근대화를 이룩하려 했다. 비록 그의 변혁 의지는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좌절당하고 말았지만 그가 영도한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의 봉건제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실증했고, 민중을 반침략·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명숙(明叔), 호는 해몽(海夢). 왜소한 체구 때문에 녹두(綠豆)라 불렸고, 훗날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 있는 전봉준 묘소가 소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동산

전봉준의 청년시절 조선사회는 극히 어수선했다. 개항을 계기로 하여 외세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봉건 말기의 위기적 상황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었다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봉준 역시 나라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했으며, 고민의 과정에서 1888년(고종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고한다.

1890년 무렵에는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서는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자세히 밝혔다.

그는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다음과 같이 시를 한 편 남겼다. "시래천지개동력(時來天地皆同力), 운거영웅부자모(運去英雄不自謀), 애민정의아무실(愛民正義我無失), 애국단심수유지(愛國丹心誰有知)" 때를 만나서는 천하가 다 힘을 합하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일이 무슨 허물이랴마는,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그후 후천세상을 꿈꾸었던 민초들의 아쉬운 비원의 마음을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로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 전북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검소한 초가형태의 전봉준 고택 전경

초라하지만 결코 빈틈이 없어 보이는 초가집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방이 나란히 달린 집으로 남부지방 일반민가의 구조와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초가 앞에는 헛간이 있고 좌측으로 마당, 우측으로는 출입문이 골목길과 맞닿아 있었다.

초가마당 앞으로는 마을의 옛 우물이 지금껏 잘 보존되어 있었고, 이웃한 할머니께서 방문자를 맞아 도움을 주시고 계셨다. 전봉준 고택 우측으로는 도우미 할머니의 잘지어진 초가가 있어 역사를 물으니 최근에 시에서 마련해 주었노라고 귓뜸해 주었다.

▲ 녹두 장군 전봉준 고택 옆에 자리한 도움을 주는 할머니의 초가집 전경

여기서 '녹두 전봉준, 반세계화운동의 선봉에 서다'(원광대 원불교학과에 박맹수님)의 글을 잠시 살펴보겠다.

"수운과 해월이 실현하고자 했던 동학의 꿈은 동학혁명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된다. 그 꿈의 구체적 내용들이 동학군들이 정부에 제출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폐정개혁안은 현재까지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오지영의『동학사』에 실려 있는 12개조, 정교의 『대한계년사』에 실려 있는 13개조, 김윤식의『속음청사』에 실려 있는 38개조(중복을 제외하면 29개조), 『동경조일신문』명치 27(1894)년 7월 24일자에 실려 있는 13개조, 동 신문 명치 28년 5월 7일자에 실려 있는 27개조 등이 그것이다.

이들 폐정개혁안은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내용의 개혁조항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개혁안의 성격을 요약하자면, 반봉건(反封建)과 반침략(反侵略), 그리고 반개화(反開化)적 성격의 개혁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반개화라는 말은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강제적으로 편입된 조선조정이 수행하고 있던 당시의 개화정책, 즉 근대화정책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표현을 빌리자면, 19세기말에 이미 반세계화운동이 동학군들에 의해 선구적으로 실천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학군에 의한 반세계화 운동의 원형은 1892년에서 3년까지 두 해 동안 조선 각지에서 진행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다. 교조신원운동이란 억울하게 처형당한 동학교조 최제우의 원한을 푸는 종교적 운동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었지만, 이 운동은 단순히 교조의 억울한 한을 푸는 운동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을 함께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 구체적 증거를 우리는 동학신자들이 1892년 10월의 공주집회 때 충청감사에게 제출한 「각도동학유생 의송단자(各道東學儒生 議送單子)」의 다음과 같은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왜국 상인들은 각 항구를 통행하며 무역의 이익을 제멋대로 함으로써 돈과 곡식이 말라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우며, 심복과 같이 좋은 땅과 인후와 같이 중요한 지역들의 세관과 장터의 세금과 산과 연못의 이익이 모두 오랑캐들에게 돌아가고 있으니, 이것 역시 저희들이 손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하는 바입니다.(규장각 소장, 『동학서』)

이 내용을 통해 동학신자들이 개항이후 조선경제가 파탄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남아 있는 기록들에 따르면, 전봉준 장군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이 교조신원운동 때로 확인된다. 그는 공주집회의 후속 집회로 열린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집회에서 커다란 활약을 하는데, 삼례집회 때도 역시 공주집회에서 제출한 것과 똑같은 내용의 의송단자가 전라감사에게 제출된다. 공주집회와 삼례집회의 목표가 똑같았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봉준 역시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정부로 하여금 척왜양(斥倭洋) 운동, 즉 반개화(반세계화) 정책을 펼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동학신자들의 신원운동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전봉준은 후일의 동학혁명을 지도하면서 신원운동 과정에서 표출된 동학신자들과 일반 민중들의 반개화적 요구를 그가 직접 작성한 각종 포고문과 격문, 폐정개혁안 등에 담아 정부에 제출한다. 전봉준이 혁명과정에서 제출한 반개화적 요구 조항의 일부를 확인해 보자.

하나, 각 포구에서 허가받지 아니하고 사적으로 쌀을 거래하는 것을 엄히 금지할 것

하나, 각국 상인들은 개항장에서만 사고팔게 하고 도성(서울)으로 몰래 들어와 장을 여는 것을 금할 것이며, 각지를 허락 없이 제멋대로 출입하며 행상을 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 (『동경조일신문』명치 27년 7월 24일, 「동학당의 소식」)

이 동학당의 소식이라는 기사 속에 등장하는 전봉준의 폐정개혁안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1880년대 해월의 통문에서 확인되는 수입품 금지운동이 신원운동 과정을 거치는 동안 더욱 반개화(반세계화)적 요구로 발전하고, 그것이 다시 동학혁명 과정을 통해 폐정개혁 요구로 확대 발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아래로부터 조선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했던 동학의 독자적 근대의 길이 창도 초기부터 갑오년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단절됨 없이 줄기차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주체적 학문인 동학의 사상과 조직을 기반으로 유무상자의 공동체, 즉 서구의 근대와는 다른 조선 민중의 생활세계에 바탕한 독자적인 근대의 길을 열려 했던 동학혁명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서구적 근대의 무차별적 공세 앞에서 조선 민중의 독자적 근대의 길이 처절하게 좌절당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이 땅에는 서구적 근대를 향한 질주가 시작된다.

1905년 동학이 천도교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서구적 근대의 첨병 일본 제국주의와 일정하게 타협하는 것이 가장 역설적인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야스마루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 민중은 결코 자신들의 독자적인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조선 민중들은 갑오년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다. 증산 강일순(1871-1909)과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증산 선생과 소태산 선생의 생애와 사상, 실천 속에 담겨 있는 조선 민중의 독자적 근대지향에 대해서는 후일을 기약하기로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가진자들의 횡포와 부, 외세에 의한 세계화 전쟁속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동학혁명 역사유적 답사는 "다시금 녹두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희망"을 안고 다음과 같은 동학농민정신을 생각하여 보았다.

지금, 우리들이 추구해야 할 정신문명은 전북 문화저널 98년 11월호 실린 글 처럼, 미래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사상과 세계관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이어져온 정신세계인 평등사상, 혁명사상, 자주사상(자신이 주체로서 판단하고 행동함)과 자율성(자신이 자신을 제어함)을 존중하는 사상, 생명사상(인내천人乃天-사람이 하늘과 시천주侍天主-사람이 한울을 모심), 자치운동을 미래사회의 대안으로 교육하고 연구되어져야 하며 동시에 생명과 평화, 공동체운동으로 실천을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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