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민중만큼 두려운 존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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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민중만큼 두려운 존재 없다
  • 김홍한
  • 승인 2015.11.02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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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조 든 사회를 살리는 길

노후준비

내가 요즈음 노후 준비를 한다. 1차 노후 준비는 몇 년 전에 끝냈는데 아직 부족하다 싶어 하나 더 하기로 했다.

   


1차 노후준비는 눈이 어두워져 성경을 못 볼 것을 대비해서 성경을 모두 타이핑하여 컴퓨터에 저장했다. 글자를 크게 해서 보면 참 편하다. 이제 간단한 메모, 간단한 주석, 간단한 설교요약도 그곳에 한다.

2차 노후준비는 성경을 내 목소리로 낭독하여 녹음하는 것이다. 내 목소리로 녹음한 것을 들으니 귀에 쏙쏙 들어오고 참 좋다. 대충 계산하니 200시간이 필요하다. 하루 한 시간씩 투자한다면 1년 안에 가능하다.

이런 노후준비는 잘 되는데 경제적 노후준비는 꿈도 못 꾼다. “곡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맘이라 주머니 사정이 그런대로 괜찮을 때는 여유도 있고 자신감도 있더니만 형편이 쪼들리니 여유도 사라지고 자신감도 줄어든다. 공짜로 여행시켜 준다고 해도 시큰둥이요 입에서는 저절로 “주님, 도와주세요.”라는 기도가 흘러나온다. 아!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게 하시는구나.
아직 노동력이 있는 나이임에도 이러한데 늙어서 노동력을 상실 했을 때의 궁핍을 어떻게 견딜까? 사람들이 노후준비로 오로지 돈에 매달리는 것이 당연하다. 적어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예수께서 나를 질책하신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복음 6장)

“너는 목사라는 자가 어찌하여 내일 일을 걱정하느냐? 내가 하루살이도 먹이고 들꽃도 입히지 않느냐?”

그러면 나는 항변한다.

“주님, 주실 것이면 속 푹푹 썩기 전에 주실 일이지 왜 속 썩을 대로 썩은 후에 주시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야 주시고, 어떤 때는 끝내 주시지 않고 그러십니까?”

“기도하라고 그런다. 감사할 줄 알라고 그런다. 미리주고, 충분히 주면 네가 잘나서 풍족한 줄 안다. 미리 주고 풍족히 줬더니 기도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오만방자 하더라. 왜, 내말이 틀리냐?”

“그럼 뭐 풍족한 놈들은 기도하고 감사하고 겸손해서 미리미리 풍족하게 주십니까?”

“너 왜 너 자신을 남하고 비교하느냐? 내가 언제 너하고 다른 놈하고 비교하더냐? 너는 너고 그는 그다.”

“치~ 할 말 없으시니까 ‘너는 너고 그는 그다’고 하시네. ~ 투덜투덜~”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 염려하지 말고 내가 지워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라.”

“예”

이야기신학 125호에 이런 글을 썼다.

“목회는 열심히 하면 안 된다. 성실히 해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은 성공하기 위한 것이요 대가를 구하는 것이다. 열심히 하는 것은 그 열심히 지나쳐서 목회를 그르칠 수 있다.
성실히 하는 것은 결과에 관계없이 언제나 옳다. 열심히 사는 삶은 후회가 남을 수 있지만 성실한 삶은 후회가 없다.
목회자에게 목회는 성공도 실패도 없다. 성실히 목회한 이에게 목회는 그 자체가 성공이다. 그러나 목회에 어떠한 목표를 정해놓고 열심히 노력한 목회자에게 목회는 목회가 아니라 개인사업과 같다.
목회자에게 목표는 있을 수 없다. 목표가 있다면 그 목표는 주님이 설정할 일이지 목회자가 설정할 일이 아니다. 목회자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라면 그 목회는 주님과는 관계가 없다.”

학문의 자유, 사상의 자유

1600년(선조 30년)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이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 그런데 그의 시험답안에 장자의 글귀를 인용한 것이 드러났다. 선조임금이 그를 꾸짖었다. “유교경전에도 인용할 곳이 많은데 어찌하여 장자의 밝지 못한 말을 인용했느냐?” 그의 합격은 취소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학문의 자유가 없었다.

조선 전기 까지는 오로지 유학만 학문이었다. 그래서 노·장 냄새를 풍기는 화담 서경덕의 학문은 도외시 되었다.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편찬 및 완성(1781년)된 중국 최대의 총서인 四庫全書에는 조선 유학자의 글로는 유일하게 서경덕의 화담집이 실렸으나 정작 조선에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이다. 율곡 이이는 소싯적에 불교를 공부했다 하여 두고두고 비난거리가 되었다.

조선의 학문은 유학 중에서도 주자학만이 학문이었다. 임진왜란(1592년)때에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수들 중에는 양명학자들이 많았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주자학 보다 양명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학자들이 오로지 주자학에만 집착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에 찌든 조선의 유학자들이건만 학문은 명나라의 것을 따르지 않았다. 마치 오늘날 미국을 천사의 나라처럼 숭배하는 자들이 동성애허용 등에 대해서는 극렬하게 거부하는 것과 같다.

21세기, 우리나라에 학문의 자유가 있을까? 학문의 탄압은 조선시대 보다 훨씬 더하다. 토정 이지함은 과거시험의 합격이 취소되는 정도였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죽을 수 있다.

“너는 용공, 종북, 빨갱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명예훼손이나 모욕의 말이 아니라 죽이겠다는 말이다. 너는 학살당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은 살인 협박이다.
“그래, 나는 빨갱이다. 어쩔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면 정말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은 물론 학자들, 문인들, 성직자들 중에 그 누구도 “나는 빨갱이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사람은 없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지 사상의 억압, 학문의 억압은 있었다. 신앙의 억압도 있었고 종교의 억압도 있었다. 지금도 각종 억압과 차별이 엄존한다. 차별이 심하면 억압이 되고 억압이 심하면 죽인다.

차별하고 억압하는 이들은 그것이 마치 진리수호, 불의에 대한 배척으로 알고 사명감(?)을 가지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진리수호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다름과 틀림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적 발상이던지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 유럽에서 일어났던 마녀재판, 유대인차별과 같은 것이다.

망조 든 사회를 살리는 길

어찌보면 역사는 차별하는 이들과 차별 당하는 이들의 투쟁이다. 차별하는 이들은 지금 그대로의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들과 다른 이들의 사상과 학문, 종교를 경계한다. 때때로 차별 당하던 이들이 주류가 되었을 때 역사는 급격하게 발전한다. 그것은 기득권자들을 뒷받침 하고 있던 다수의 기층민중들이 심한 어려움으로 등을 돌릴 때 가능하다.

권력이 부패하면 사회 기강이 흐트러지고 법질서가 무너진다. 필연적으로 극심한 빈부격차로 나타난다. 양민들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가정이 해체된다. 양민들은 노비가 되던지 터전을 떠난 유랑민이 된다. 그들이 모여서 세를 이루면 도적이 된다. 생산기반인 양민이 붕괴하니 세금을 거둘 수도 없고 병역도 지울 수도 없다. 신라가 망할 때 그랬다. 고려가 망할 때도 그랬다. 조선이 망할 때도 그러했다.

언제 백성들이 살만 했을까? 충분히 반박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리석은 나의 시각으로 볼 때 왕권이 강할 때 백성들은 살만했다. 왕권이 강할 때 착취자는 왕 한사람이었지만 귀족들의 힘이 강할 때는 착취자가 여럿이기 때문이다.
당쟁이 심할 때 비교적 백성들은 살만 했다. 당쟁이 심할 때는 권력자들이 서로 심한 견제를 한다.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판에 부정과 부패를 적대세력이 두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정조임금이 서거하고 순조임금이 등극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견제세력이 없는 세도정치는 백성을 한없이 착취했다.

건강한 사회는 건전한 경쟁, 건전한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회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사회는 경쟁하고 투쟁해야 할 이들의 힘의 균형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정치적으로는 야당이 힘을 잃었다. 일찍이 야당이 이렇게 무기력한 적이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중소기업, 자영업자들이 몰락하고 있다. 대기업은 대기업끼리 경쟁해야 하는데 대기업들이 담합하여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을 경쟁상대로 삼았다.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자들끼리 경쟁해야 하는데 자영업자들이 대기업과 경쟁한다. 결과는 뻔하다.

일전에 “대한민국 잔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의 전성기는 지났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다. 지금 기성세대라 할 40 - 50대 연령의 사람들은 많은데 젊은이들이 적다. 1971년생(현 45세)은 102만 명 출생했는데 점점 줄더니 2002년생(14세) 이후로는 출생자 수가 50만이 안 된다. 우리사회의 재앙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사회든지 사회가 지나치게 보수적이면 사회는 발전하지 않는다. 반면 너무 진보적이면 사회는 위험하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기성세대는 보수적이고 젊은 세대는 진보적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젊은 세대의 출생자 수가 기성세대의 출생자 수에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사회 전체가 늙고 생각도 보수가 되어간다. 출생자 수의 감소는 정치권력의 향방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런 추세라면 향후 40~50년 동안은 보수 세력이 우위를 점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사회의 보수집단은 자신 만만한 모습이다. 드러내 놓고 비상식적인 발언과 행동들을 거침없이 해댄다.

기성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 기성세대가 기득권을 고수하다 보면 그나마 반 토막 난 우리의 소중한 젊은이들이 살 수가 없다. 수 백 명 어린 생명이 수장되어도 책임지는 이가 없고 젊은이들의 일자리는 허접한 일자리가 대부분이요 그나마 비정규직이 절반이다. 취업도 포기하고 결혼도 포기하고 아기출산도 포기한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우리사회의 미래가 붕괴되고 있는데 ‘연금을 든다’, ‘보험을 든다’ 하면서 아무리 노후준비를 철저히 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맡아 줄 젊은 세대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우리나라 옛 이야기 중에 “고려장”이야기가 있다. 역사 속에 그러한 풍속은 없었는데 이야기만 전해진다. 아마도 효를 가르치기 위한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세대에 ‘고려장’이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든다.

더 늦기 전에 특단의 조치를 해야 한다. 좀 엉뚱한 제안을 해 본다. 우리 사회가 미성년자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않는다.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같은 이유로 나는 일정연령 이상의 노인들에게는 참정권을 주지 말자는 제안을 한다. 완고함과 노욕으로 똘똘 뭉친 늙은이들이야말로 판단력을 잃어버린 이들이라는 생각이다.

져야 하는 싸움

자식에게는 지는 싸움을 해야 한다. 자식이 아비와의 싸움에서 지게 되면 아이는 삐뚤어지던지 기가 죽어서 쭈그러든다. 아내와의 싸움에서도 져야 한다. 이긴다면 그보다 몇 곱절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랫사람과의 싸움에서도 져야 한다. 이긴다면 아랫사람은 고급인력도 단순노동자로 전락한다. 부모와의 싸움에서도 져야 한다. 형제간의 싸움에서도 져야 한다. 아니 처음부터 싸움이 없어야 한다. 형제간의 싸움은 지던 이기던 관계없이 커다란 망신이다.

- 성서 읽기 -
두려운 사람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났다. 이 일을 지켜 본 사람들이 마귀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나았으며 돼지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 주자 그들은 예수께 그 지방을 떠나 달라고 간청 하였다. (막 5장 15-18절)

귀신들린 자를 무서워하지 않고 그가 멀쩡한 정신이 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왜 귀신들렸던 사람이 멀쩡해 진 것이 두려움일까? 이것이 이 성서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다.

군대마귀의 이름이 “레기온”이라고 했다. “레기온”은 로마군단을 이르는 말이다. 마귀 들렸던 사람은 로마의 지배와 착취에 신음하던 민중을 상징한다. 돼지는 그 민중들이 먹을 양식을 빼앗아 키운 제국주의경제다. 군대마귀는 돼지를 볼모로 예수께 대항한다. 자신들을 쫓아내면 돼지 떼를 다 죽임으로 경제를 붕괴시키겠다는 협박이다. 그러나 그러한 협박은 예수께 통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돼지경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제국주의경제, 귀족경제, 재벌경제가 망해야 서민경제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군대마귀가 쫓겨나고 돼지경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귀신들렸던 사람, 돼지경제에 무참히도 착취당했던 민중이 제정신을 차렸다. 군대마귀를 하나님처럼 섬기고 돼지경제를 풍요로움으로 알고 있던 이들에게 두려움이 엄습한다. 민중이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정신을 차렸다. 빈민이 정신을 차렸다.

깨어있는 민중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다. 역시 그 상황을 만들어낸 예수야 말로 두려운 존재다. 예수를 믿는 교회야 말로 그 일을 해야 한다. … 군대마귀와 짝하여 돼지경제를 키워온 그들은 예수께 그 지방을 떠나달라고 간청한다.

조선 선조임금 때에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혁명적 사상가 교산 허균은 <호민론>에서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을 이야기 한다.

“ …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항민(恒民)이다.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모질게 착취당하여 …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원민(怨民)이다.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세상을 흘겨보다가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호민(豪民)이다.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 때를 노리다가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항민도 또한 제 살 길을 찾느라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무도한 놈들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허균이 말하는 “호민”이란 참으로 두려운 존재다. 국가전복을 꿈꾸는 반역자라 할 수도 있고 불의한 세상을 뒤집는 혁명가라 할 수도 있다.

아! 오늘날 우리는 군대마귀에게 복종하고 그가 만들어낸 돼지경제 치하에서 돼지처럼 살고 있다. 군대마귀는 우리를 끊임없이 협박한다. 경제를 마비시키겠다고, 그러나 그 제국주의 경제가 망해야 서민경제가 살아난다. 삼성이 망해야 중소기업이 산다. 이마트, 홈플러스가 망해야 지역상권이 살아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 논어 읽기 -
子張 12장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刷掃 應對̖ 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
(자유 왈 “자하의 제자들은 물 뿌리고 비질하고 묻고 대답하고 나가고 물러나는 일에는 가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말단적인 일들이라 근본이 없으니 어찌하랴?” 하였다. 이에 자하가 듣고 말하기를 “아! 子游의 말은 지나치구나! 군자의 도는 먼저 전하고 뒤로 미루어 게을리 할 것이 무엇인가? 초목에도 구별이 있는 것과 같이 군자의 도는 업신여길 수가 없는 것,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오직 성인뿐이다.!”)
* 洒掃̖應對(쇄소응대/ 물 뿌리고 비질하고 묻고 대답하는 일상적인일), 誣(업신여길 무)
* 洒(물뿔일 쇄, 刷)

헌문 37장에서 공자는 下學而上達을 말하였다. 즉 刷掃應對(쇄소응대) 하는 하찮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극한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자가 이러한 사소한 일을 가볍게 여기니 유자의 생각이 구름을 잡는 듯 허황할 수 있다. 그러나 또한 유자의 말에 일리가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刷掃應對하는 下學 속에 살아가지만 上達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근본이 되는 大德을 형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자는 바로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른바 진리를 얻고자 하는 근본이 바로서지 못한다면 쇄소응대는 小知에 머물 뿐 결코 大知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13장  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
(자하 왈 “벼슬살이 하면서도 여력이 있으면 학문할 것이요, 학문을 하면서도 여력이 있으면 벼슬할 것이다.”)
* 優(넉넉할 우, 有餘力)

필자는 “~ 여력이 있으면”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군자에게 학문은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지 여력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더욱 그러하니 철저히 학문해야 함은 당연하고 자신의 학문이 짦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이다.

벼슬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니 벼슬은 여력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벼슬하는 사람은 그 벼슬살이를 잘 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학문해야 할 것이요 학문하는 이도 벼슬살이에 뜻을 두었다면 적극적으로 임해야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식의 자세라면 처음부터 포기함이 옳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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