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인간에게 믿음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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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인간에게 믿음을 갖자
  • 김홍한
  • 승인 2015.10.0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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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서 죽을 때 영원을 산다

아주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홍수설화가 있다. 목도령 설화이다.

옛날, 하늘나라 선녀가 나무의 정령과 교접하여 아들을 낳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아이는 나무 아버지 밑에서 놀며 성장하여 사람들은 그를 ‘나무도령’이라 불렀다. 어느 날 나무가 말했다.

   


“앞으로 큰 비가 와서 내가 뿌리째 뽑히거든 나를 배 삼아 타서 살아 남아라.”

얼마 되지 않아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다. 나무도령은 넘어진 나무를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려갔다. 그러던 중 나무도령은 작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떠내려가는 개미떼를 구해주었다. 그 외에도 이런 저런 작은 동물들을 구해 주었다. 그러던 중 위기에 처한 한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을 구해주려 하였으나 나무 아버지가 반대하였다. 나무도령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나무 아버지가 반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도령은 그 소년을 구해주었다.

비가 멎고 나무도령 일행은 높은 산에 닿았다. 두 소년은 살 곳을 찾아 헤매다가 한 노인이 딸과 여종을 데리고 사는 곳에 이르렀다. 온 세상에 사람이라고는 이들 뿐이었다. 나무도령이 구해준 그 소년은 어여쁜 노인의 딸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자신을 구해준 나무도령을 죽이려 하였다. 이런 저런 거짓말로 나무도령을 모함하여 나무도령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 때마다 개미나 다른 동물들이 나무도령을 도와서 나무도령은 모든 오해를 극복하고 딸과 결혼했고 나무도령이 구해준 소년은 여종과 결혼하게 되었다. 이들이 홍수 이후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신화는 인간들의 오만함과 추악함, 사랑과 미움, 증오, 질투, 배신 등 인간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들끼리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신들에게까지 도전하고 속이고 배신 한다. 신에게 자신을 맞추기 보다는 신들을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인간의 역사란 신에 대한 도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들은 한없이 추하고 비열하고 잔혹하고 영악한 면이 있기도 하지만 반면 인간들에게는 신보다도 더 거룩한 모습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희망이 있다. 역시 신화를 살펴보자.

신화 속에서는 인간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신들도 무수히 많은 죄를 짓는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죄에 대해서 후회도 하고 회개도 하고 죄 값도 받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죄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스스로 죄 값을 치르고자 한다. 반면 신들은 후회는 하더라도 회개는 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죄 값도 치르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는 자청하여 자신의 죄 값을 치르고자 하지만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불어넣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한 헤라여신은 죄 값을 치르기는커녕 회개도 후회도 없다. 헤라보다 헤라클레스가 더 거룩하지 않은가?

신을 믿을 수 있을까? 유치하게 신의 존재여부를 가지고 믿음을 논하지 말라.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다. 신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차이가 있을 뿐 진정한 무신론자는 없다.
신을 믿는다면 신의 선함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신의 능력을 믿는 것일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신화속의 신은 선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다.
인간을 믿을 수 있는가? 신을 믿는다는 말과 인간을 믿는다는 말은 같은 것이다. 신을 믿어도 인간이 믿는 것이요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간 스스로가 믿지 못하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과 믿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믿고 믿지 못하고의 문제와 같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갖자. 인간은 한없이 더럽고 추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믿음을 갖자. 늙은이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젊은이들에게는 때 묻지 않은 정렬과 사랑과 순수함이 있지 않은가?

신앙한다는 것은 살아서 죽고 죽어서 사는것

살아있는 것은 부드럽다. 살아있는 풀은 부드럽고 죽은 풀은 뻣뻣하다. 살아있는 사람은 부드럽고 죽은 사람은 뻣뻣하다. 나무도 그렇다. 살아있는 나무는 부드럽고 죽은 나무는 뻣뻣하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이 무슨 역할을 하려면 죽어야 한다. 다른 것을 살리려고 먹이가 될 때도 죽어야 한다. 죽어야 먹을 수 있다. 꿈틀꿈틀 산낙지도 이빨로 꼭꼭 씹어서 완전히 죽여야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다.
나는 목수다. 살아 있는 것으로는 무엇을 만들 수 없다. 산 나무는 다루지 않는다. 나무를 사용하려면 죽여서 오랫동안 말려서 딱딱해져야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수 십 년 성장하여 훌륭한 재목이 된 나무는 죽어서 천년을 간다. 살아있는 나무, 죽었으되 덜 마른 나무로는 무엇을 만들 수는 없다. 혹 만든다면 갈라지고 비틀어져서 본래 의도한 물건을 만들 수 없다.

유가사상과 노장사상에 불만이 있다. 儒家는 生만을 이야기 하지 死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老莊은 생명의 고귀함만 이야기 하지 죽음의 거룩함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감이다.
사람이란 살아서 사는 것 보다 죽어서 사는 것이 진짜 삶일 수 있다. 살아서 하는 말보다 죽어서 하는 말이 진짜 말일 수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렇지 않다. 죽어서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많은 제자를 거느리는 이들이 성현이다.

나무가 죽고 말라야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다. 제 안에 제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제 안에 제가 죽고 하늘의 생명으로 되살아나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서 만들어낸 성과라는 것들은 평가하기가 어렵다. 살아서는 가공할 권력을 누렸지만 죽어서는 그 권력의 크기만큼 비난을 받는 이들이 있다. 살아서는 초라하지만 죽어서 장구한 이들이 있다. 예수는 어떠한가? 살아서 30년이지만 죽어서 2천년이다. 살아서 30년도 예수가 산 것이 아니다. 인간 예수는 죽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살아 30년이다. 그래서 죽어서 영원하다.

살아서 죽어야 한다. 해탈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거듭남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학문한다는 것, 수행한다는 것, 신앙한다는 것도 그것이다. 학문한다는 것은 자기를 키우는 것이고 수행한다는 것은 바르게 자라는 것이고 신앙한다는 것은 자신을 죽여 하늘이 사용하시는 단단한 재목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울선생은 “나는 매일 죽노라”했다.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다”고 했다. 신앙이란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 그래야 산다. 그래야 영생이다.

도대체 나의 무엇이 죽어야 하는가? 생물학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인 죽음은 때가 되면 저절로 될 일,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내가 죽여야 할 나는 욕망의 나다. 욕망의 나로 살아가면 나무도령을 죽이려는 음모와 탐욕과 술수의 소년일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삶은 영원을 사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순간을 스쳐가는 생명이다. 나무는 죽어서 천년을 산다. 사람은 살아서 죽을 때 영원을 산다.

슬픔을 바닥까지 아는 이들 -동성애자들의 슬픔-

동성애를 합법화 하자는 말은 하지 않겠다. 동성애가 좋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동성애는 있었다. 소위 성윤리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는 동성애가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동성애자가 매우 많았더라면 동성애는 평범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성애자에게 동성의 누군가가 사랑을 고백한다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일이다. 또한 자신과 관계없는 동성애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고 감정적 동조가 되지를 않는다.

다수의 이성애자들에게 감정적 동조가 되지를 않는 소수의 동성애자들은 이방인이다. 소수이기에 약자다. 그래서 마음 놓고 흘겨볼 수 있다. 다수가 소수에 대한 횡포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 의해서 신화가 만들어졌다. 그 중에는 동성애이야기들이 있다. 그 누군가가 태양신 아폴론을 동성애자로 표현했다.

아폴론이 휘아킨토스라는 청년을 사랑했다. 아폴론이 던진 원반을 주우려 달려가던 휘아킨토스는 돌에 부딛혀 튀어오르는 원반에 맞아 죽고 말았다. 큰 슬픔에 빠진 아폴론이 그를 꽃으로 만들었다. 그 꽃에 자신의 안타까움도 새겨 넣었다. 그 꽃이 휘아킨토스(히아신스)다.
아폴론은 파이스 라는 청년도 사랑했다. 그 청년의 이름에서 ‘파이도필리아(남색)’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아폴론은 자신의 아들 퀴크노스를 사랑했다. 아비가 딸을 범했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아버지가 아들을 범했다는 말은 아폴론의 경우가 처음이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동성애를 감당하지 못한 퀴크노스는 호수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백조가 되었다.

신화 속에서 동성애는 비극으로 끝난다. 신화조차도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동성애로서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은총으로 성전환이 되어서 가능했다. 性이 바뀐 이피스가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한다.

“처녀로서 약속드렸던 이피스의 제물을 청년이 된 이피스가 드리나이다.”

신화속의 동성애가 불행하지만 현실속의 동성애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백조의 호수>로 유명한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에 빠졌다. 자신의 조카를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슬프다. 사랑이 깊을수록 슬픔도 깊다.

차이코프스키가 <인형의 집>을 쓴 입센을 만났다. 입센도 동성애자였던 모양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입센에게 말했다.

“우리는 슬픔을 바닥까지 아는 사람들이오.”

그들의 슬픔을 죄악시 하지는 말자. 그들의 슬픔을 추하다고 하지는 말자. 그들이 - 자신들의 슬픔이 너무도 억울해서 - 슬픔이 아니고자 하는 몸부림을 비웃지는 말자. 그들의 깊은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기를 바란다.

역사이야기 역사 평가의 기준

역사를 보면서 선악의 구별에 어려움이 있다. 옳고 그름의 구별도 쉽지 않다. 많은 혼란 가운데 나름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생겼다. 사람의 생명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아무리 공이 많아도 사람을 많이 죽이던지 죽게 하던지 한 이들은 좋게 평할 수가 없다. 영토를 크게 넓혔다 하더라도, 훌륭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나는 좋게 평할 수 없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몽골의 칭기즈칸, 고구려의 광개토태왕과 같은 이들은 정복군주이다. 비록 자기 나라를 크고 강하게 한 군주들 이었으나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였다. 태종 이방원, 세조(수양대군) 같은 이들은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죽였다. 왕권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이었으나 권력욕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맹자는 말하기를 “성인은 한 가지 불의한 일을 행하고 한사람 허물없는 이를 죽여서 천하를 얻는다 해도 하지 않는다.” (맹자 공손추 상 2장) 고 했는데 그들은 권력을 위해서 허물없는 이들을 너무 많이 죽였다.

한 생명이 중요하다. 한 생명을 가볍게 여길 수 있다면 천명, 만 명, 백 만 명의 생명도 가볍게 여겨 학살 할 수 있다. 정상적인 사람은 한 사람만 죽여도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폐인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그것을 마치 훈장이나 되는 냥 자랑을 한다. “내가 적을 이렇게 죽였다. 내가 적을 이렇게 많이 죽였다”고 .... 나는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과연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의심을 하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이들은 천하의 악인들이다. 그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고 공로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것을 크고 높게 평가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모두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결정적인 악행이 있다. 그들은 죄 없는 이들을 참으로 많이 죽였다. 정치라는 것이 사람을 살리자는 것인데 그들은 권력을 위해서 사람을 죽였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정치란 말인가? 경제라는 것은 사람을 풍요롭게 하자는 것인데 그들은 풍요롭게 해야 할 사람들을 죽였다. 문화라는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자는 것인데 그들은 사람을 참 많이 죽였다. 소위 정치나 군사로 위대하다는 역사적 인물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가 비교적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이들 중에도 사람을 많이 죽인 이들이 있다. 조선의 기초를 세운 삼봉 정도전도 무척 많은 사람을 죽였다. 정치적 반대파는 물론이고 고려의 왕족인 왕씨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왕씨들을 죽이는데 가장 앞장섰던 이가 정도전이다.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도 많은 이들을 죽였다. 1589년 정여립의 난과 관련된 자들을 처형한 <기축옥사>를 주도하면서 동인계 인사 천 여 명을 죽였다. 서유견문으로 유명한 개화파 정치인 유길준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들은 나름으로는 명분을 갖고 그렇게 했겠지만 사람을 많이 죽인 그들이기에 다른 공로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중죄인으로 평해야 한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할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비록 침략군을 격퇴하는 전쟁의 와중에서 죽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만일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성현들 앞에 늘어 논다면 그 분들은 말씀하실 것이다.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면 애도해야 하는 것,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를 喪禮(상례)로 처리해야 한다” (노자 31장)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극형에 처해야 한다.” (맹자 이루상 14장)
“의로운 전쟁은 없다. 저가 이보다는 좀 낫다는 있을 수 있다”(맹자 진심하 2장)
석가께서는 “칼 찬자 에게는 설법하지 마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다.

세종이 성군인 이유가 있다. 그분이 공을 많이 세워서가 아니라 그분의 성품이 훌륭했다.

“세종은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큰 죄를 지은 자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최소의 처벌을 내렸다. 그가 아끼던 후궁의 오라비인 홍유근은 임금의 나들이를 돕는 사복이었는데 ... 어느 날 연을 탔는데 연을 끄는 말이 절룩거렸다. 그 내력을 알아보니 본디 연 끄는 말은 홍유근이 타고 저는 말로 연을 끌게 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시위에게 ‘만일 대간이 이 일을 알면 죽일 것이니 소문을 내지 말라’고 이르고 홍유근 에게는 걸어서 오라는 처벌을 내렸다. 대간이 알고 그를 죽여야 한다고 건의하자 멀리 도망치라고 이르고 궁에서 내보냈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9> p165-166, 한길사 -

프랑스혁명에서 배우자고? 혁명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혁명인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서 혁명하자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 역사를 자랑한다.

논어 읽기

子張 4장  子夏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是以君子不爲也. 」
(자하 왈 “비록 小道에도 필히 볼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따라가면 진창에 빠질까 두렵다. 따라서 군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 小道(소도/ 농업, 의술, 점술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기술), 恐(두려울 공), 泥(진흙 니)

莊子는 소 잡는 백정에게서 道를 보았는데 하물며 어디엔들 도가 없겠는가? 아주 하찮은 일을 하는 이들도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그 분야에서는 도를 얻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도가 있다고 작은 도를 쫓아 전념하게 되면 작은 도 밖에는 얻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에 갇혀서 더 큰 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군자는 큰 도를 쫓는다.
작은 산에라도 일단 정상에 오르면 확 트임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을 전부인 것으로 알고 집착한다면 고루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니 큰 산에 올라야 한다. 큰 산이란 성현의 가르침이다. 소 잡는 백정, 석수장이, 목수의 일로도 도에 가까이 갈 수는 있겠지만 그래 보았자 샛길이다.

5장  子夏曰: 「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 」
(자하 왈 “날마다 그 바라는 것을 날이 가고 달이 가도 그 능력을 잃지 않는다면 가히 호학하는 자라 할 것이다.”)

머리가 명석하여 배우면 금방 익히되 역시 금방 잊어버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 머리가 둔하여서 늦게 배운다 하더라도 한번 배우면 잘 잊지 않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진정 호학하는 이라면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도 있어야 하겠지만 얻은 것을 소중히 여겨 잘 갈무리해 두고 거듭거듭 깊이 생각하여 體化시키는 이일 것이다.
경전공부란 지식의 축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체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경전은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여러 번, 반복적으로 보아야 한다. 소화되지 않는 내용은 소화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섣불리 단정하고 결론을 내리면 필히 후회하게 된다.

6장  子夏曰: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 」
(자하 왈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절실히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해 나가면 인이 그 가운데 있다.”)

공자께서 여러 가지로 好學에 대하여 말하였지만 자하가 잘 정리하였다.
널리 배우지 않으면 편협하여 쓸모가 없다. 독실하지 못하면 남는 것이 없다. 절실하지 않으면 배움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까운 것부터 하지 않고 크고 원대한 것만 생각하면 그 생각이 허황된 것이니 그 수고가 헛되다.

사람은 다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仁할 수는 없다. 仁한 이가 되는 것은 修身이 제일이다. 수신하는 것은 好學하는 것이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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