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게 죽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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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죽어 주세요
  • 김홍한
  • 승인 2015.08.1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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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한목사의이야기 신학 139호

아름답게 죽어 주세요

이야기 신학에 죽음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 감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서 쓴 글이 아니다. 장차 내가 그렇게 죽고자 하는 바람을 쓴 것이었다.

   


지난 6월 말, 예수살기 수련회에 참여했는데 거기에서 조화순목사(감리교 원로목사)에게서 다소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말이 다시금 죽음의 문제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이덕주교수(감리교신학대학 한국교회사)가 긴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만났는데 다짜고짜 하는 말이 ‘목사님 제발 아름답게 죽어 주세요’ 라고 하더라고. 목사들의 죽는 모습이 너무 추하다는 거야 ….”

이야기는 여기에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다른 무슨 이유로 말이 끊겼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계속된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다. 끊겨진 그 말이 스멀스멀 내 머릿속을 기어 다닌다.

한국교회사를 전공한 이덕주 교수는 많은 선배목사들의 죽음이 아름답지 못한 것에 심히 실망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가 존경하는 조화순 목사에게 “당신만이라도 아름답게 죽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도대체 목사들이 어떻게 죽었기에 그가 그런 말을 할까

목사는 마땅히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죽음을 순종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데, 애써 죽음을 피하려 한다. 보통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히려 더 안쓰럽다. 어떤 이는 임종순간까지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차있다. 어떤 이는 삶에 대한 집착이 너무 커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어떤 이는 듣기 민망한 욕설과 저주를 퍼부어댄다. 평생을 “거룩해야한다”, “경건해야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살다가 그것이 깨지면서 그리된 것일까

평소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에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자 심히 당황한다. 죽음 앞에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모두 허사가 된다.

“어떻게 살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아무리 멋지고 화려한 삶을 살았더라도 그 죽음의 모습이 비참하고 추하다면 그의 살아온 날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삶이 아름다웠다면 죽음이 비참하고 추할 수 없다.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과 추한 것은 구별해야 한다. 아! 목사들의 죽음이 비참하고 추하다면 너무 부끄럽고 너무 서글픈 일이다.

나는 아름답게 죽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해 왔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죽음을 순종함으로 받으려 한다고 늘 다짐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가끔 죽는 연습을 한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을 때, 문득 그 연습을 한다.

죽음이 임박한 내가 정신이 멀쩡하다면 어찌할까? 굶어 죽어야겠다. 굶어 죽는 것이 어려울까?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사람이 억지로 굶는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힘들겠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사람은 먹는 것이 굶는 것 보다 더 힘들다. 몸이 이미 음식을 거부하니 굶는 것이 더 쉽다. 굶으면서 몸이 작아진다. 몸이 작아지는 만큼 맘이 커진다. 굶고 굶어서 가벼워진 몸으로 하늘에 오를 것이다. 새는 하늘을 날기 위해서 뼛속까지 비우지 않는가 ?

아름다운 죽음을 죽기 위해서는 주변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치유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명연장을 위한 과도한 의료행위와 억지로 영양분을 주입하는 것은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것을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연장술은 계속된다. 많은 경우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행해진다. 본인이 그렇게 하지않기를 간절히 원해도 자녀들은 효라는 명분으로,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 멈추지 않는다. 의사들은 책임회피를 위해서, 더러는 수익을 위해서 그리한다. 그러니 앞으로 살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이들은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도움을 청해야한다. 가족들도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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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다. 하나님 앞에는 죽은 이가 없다. 육신을 가진 이와 육신을 벗어난 이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 앞에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고 모세도 살아있고 나도 살아 있다. 그런데 살려 달라고 매달리면 얼마나 엉뚱한 일인가?
죽을병 걸린 사람이 다급한 나머지 “이번 한번만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신다면 … 하겠습니다” 한다. 그러나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쉽게 잊고 만다. 그가 거짓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때 정말로 그런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쭉정이로 남아 있다가 추수 때가 되어 밑동이 잘릴 위기에 처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그러나 추수를 늦춘다고 쭉정이가 알곡 되지는 않는다. 무르익은 곡식들은 낫을 기다리듯이 충실한 삶을 산 이들은 죽음을 기다린다.

죽음의 그림자가 덮일 때 살려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다.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름은 물론이요 인생도 모르는 필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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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사색의 결과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쁜 꽃을 보았다. 만져 보았다. 생화가 아닌 조화다. 실망한다. 생화가 아닌 조화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예쁜 꽃에 대한 감정이 반으로 줄어든다. 꽃의 소중함도 반으로 줄어든다. 왜 그럴까? 언제든지 싱싱한 것 같은 조화는 그 영속성 때문에 그 아름다움도 가치가 적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곧 시들기 때문이다. 젊음이 아름다운 것은 곧 늙기 때문이다. 인생이 소중한 것은 죽을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이 세상은 끔찍하다. 안방 문을 열었을 때, 아주 심하게 늙은이들로 가득하다. 건넌방을 열어도 역시 늙은이들로 가득하니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진시황은 불노, 불사약을 먹으려 하였고 이집트인들은 영원히 살겠다고 미라를 만들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시시포스는 저승사자를 속이고 카론의 뱃사공을 속여서 그의 수명을 연장하였으나 죽음으로부터 영원히 도망할 수는 없었다. 그 죄 값으로 그는 큰 바위를 정상으로 거듭거듭 올려야 하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다.
뛰어난 의사 아스클레피오스, 그의 탁월한 의술로 병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 죽은 자를 살려냈다. 그것은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무는 커다란 죄다. 결국 그 죄 값으로 그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

<은하철도 999> 라는 만화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중요한 주제가 “영원한 생명”이다. 은하철도의 종착역에서는 영생의 기계 몸을 준다. 그런데 주인공 철이는 오매불망 바라던 그 기계 몸을 거부한다. 자연의 몸이건 기계 몸이건 영원히 산다는 것은 영원힌 고통임을 안 것이다. 기계 몸을 거부한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 비록 만화영화지만 깊은 철학적,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다.

불교는 영원히 윤회하자는 것이 아니다. 윤회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불교다. 생로병사가 거듭되는 윤회라는 것은 한없는 고통이니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불제자들은 해탈에는 관심 없고 윤회에서 위로를 받는다. 자신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된다는 것에 위로를 느끼는 것이다.

기원전 28세기경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가 있었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 충격 받은 길가메시는 온갖 어려움을 겪은 후에 삶과 죽음의 비밀을 깨달았다. 길가메시는 말했다.

“신들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인간의 몫으로 죽음을 주었으며, 생명은 자신들이 가졌다.”

피할 수 없는 죽음, 그것이 길가메시의 결론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좀 달리한다. 비록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 바가 있다.

“신들은 영생을 차지하고 인간에게는 죽음을 주었다면, 신들은 선택을 잘못한 것이다. 시들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닌 것 처럼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에 신은 살았다기 보다는 죽은 존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신을 모독했는가? 신은 지혜로운데, 그리고 선한데, 마땅히 지혜로와야 하고 마땅히 선해야 하는데 그런 신이 자신은 좋은 것을 차지하고 인간에게는 나쁜 것을 주었을 리는 없다. 그러면 이래야 할 것이다.

“신들은 자신들이 창조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인간의 몫으로 죽음을 주었으며, 영원한 저주인 영생은 자신들이 가졌다.”

육체의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절망이다. 그러면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도 절망이기는 마찬가지다. 영혼불멸은 좋은 것이 아니다. 영원한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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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는 영원, 영생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는 영생이 중요한 주제다. 그리스사상의 영향 때문이다. 영생, 영혼 불멸과 같은 주제들은 히브리적 사고가 아니라 헬레니즘적 사고이다.

구약성서에 영생개념이 없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구약성서를 기록한 분들이 생각이 짧아서 영생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록 어린아이라도 생각하는 것이 삶과 죽음이요, 영생인데 구약성서를 기록한 현인들이 그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는 없다. 그들이 영원, 영생을 말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개념들이 헛되고 또 헛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우 중요하되 해답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공허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자도 영생, 영혼불멸 등에 대해서는 말한바가 없는데 아마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영생, 영원의 개념이 매우 강하게 들어있다. 그것은 매우 철학적이고 매우 인간적이기는 하되 그것에 대해 침묵하는 구약성서 보다 격이 떨어진다. 신약성서는 죽음이라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일차원적인 해결책으로 영생을 받아들인 것이 아닐
까 ?

예수를 믿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성경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 3:16)

그러면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가? 그런 것이 영생이라면 성서의 가르침이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만도 못하다. 나도 영원한 생명을 사양하겠다. 천국이 또한 그러한 곳이라면 천국도 사양하겠다.

사람이 만든 피라미드, 인류문명의 상징이고 인류사회를 구성하는 기본구조다. 피라미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인다. 상하 지배구조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피라미드를 우러르며 피라미드의 정점을 추구하는 이들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이해할 수 없고 영생도 이해할 수 없다. 피라미드는 마치 영원을 사는 것처럼 4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동안을 한자리에 우뚝 서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영생을 이렇게 이해했다.
“사람은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球(구)다. 태양이 그러하고 지구가 그러하고 달이 그러하다. 태양계가 그러하고 은하계도 그러하고 우주가 그러하다. 우주만 그런 한 것이 아니라 사과, 배, 감, 포도, 수박, 사람의 머리통도 그러하다. 球(구)는 위아래가 없다. 앞뒤도 없다. 좌우도 없다. 처음과 나중도 없다. 처음과 끝이 한 점이다. 여기가 거기고 순간이 영원이다. 내가 나름대로 영생이라는 개념을 깨달은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피라미드가 아니고 球(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다. 영생은 결코 시간개념이 아니다.

- 한국사 이야기 -

시체 흥정 춘추시대 말기 정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큰 홍수가 나서 어떤 부자가 물에 떠내려가 죽어버렸다. 그 시체를 어떤 사공이 건졌는데 죽은 이가 큰 부자임을 알고 그 시체를 비싼 값에 팔려 하였다.
죽은 이의 가족들은 사공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요구하자 당시의 석학이라는 등석(춘추시대말기 정나라의 논리학자로 名家로 분류되었다)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등석이 말했다.

“그 사람은 시체를 팔 곳이 당신네 밖에 없으니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라”했다.

이제 다급해진 이는 사공이었다. 몇 일을 기다려도 죽은 이의 가족들에게서 소식이 없자 그 사공도 등석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등석이 말했다.

“그 사람들이 시체를 살 수 있는 곳은 당신밖에 없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궤변의 대표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지만 내 생각에 등석은 궤변으로 장난한 것이 아니다. 시체를 가지고 일확천금하려는 사공과 가족의 시체를 값이 비싸다고 찾아오지 않는 부자들을 조롱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 역사에 있다.
고구려 고국원왕 때의 일이다. 선비족의 나라인 前燕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342년) 고구려군은 패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그 중에는 고국원왕의 모후인 주씨와 왕비가 잡혀갔다. 그리고 전연의 군사들은 고국원왕의 부왕인 미천왕릉을 파헤쳐 그 시체를 가져가는 폐륜을 저질렀다.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시신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많은 재물을 모아 전연에 바치고 신하의 예를 올림으로 간신히 부왕의 시신을 되찾아 왔다(343년). 모후인 주씨는 13년 만에 모셔 올 수 있었다.

등석의 시체 흥정사건은 그 결말을 알 수 없지만 전연의 시체도 둑질 사건의 결말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전연으로서는 미천왕의 시신으로 막대한 실익을 챙겼고 고구려는 온갖 수모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전연은 이익만 보았고 고구려는 손해만 보았는가 전연은 명색이 하나의 국가다. 국가는 이익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명분으로 선다. 그런데 전연은 이익을 위해서 시정잡배도 행할 수 없는 너무나도 치졸하고 부끄러운 짓을 했다. 반면 고구려는 온갖 치욕과 경제적 부담을 무릎 쓰고 선왕의 시신을 찾아왔다. 그럼으로 전연의 이익은 이익이 아닌 국가의 윤리적 근간이 흔들리는 위기가 되었고 고구려의 치욕은 치욕이 아닌 명예가 되었다.

나의 억지해석일 수 있겠지만 전연은 미천왕의 시신을 도둑질해 가서 시체장사를 함으로 그 국격이 심하게 추락하고 도덕성도 잃고 민심을 잃고 외교적 신뢰도 잃어 370년 前秦에게 멸망했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영토의 넓고 좁음에 있지 않다. 백성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군사의 강하고 약함에도 있지 않다. 재물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그 나라가 얼마나 의로움을 추구하느냐에 달렸다.

시체를 도둑질해 흥정한 전연은 망해야 마땅한 나라다. 도대체 국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 국가다 그런 국가가 시체도둑질을 했다.
사람은 거룩한 존재고 가장 거룩한 순간이 죽음의 순간이다. 그리고 죽음의 모습 앞에 사람은 숙연해 진다. 그런데 무덤 앞에 예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도둑질해 갔으니 그놈의 국가가 국가일 수 없다. 전연은 이미 그 때 망한 것이다. 죽음
을 모욕한 죄 값이다.

- 논어 읽기 -

子張(자장) 이 편은 공자의 가르침은 없고 제자들의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다. 아마도 공자가 죽은 이후 주요 제자들의 이야기가 들어간 듯한데 제자집단의 여러 복잡한 관계 속에서 편집되었을 것이다. 제자들의 말에 양적 차이가 있고, 호칭에도 차이가 있으며 제자들끼리의 갈등도 보인다.

우선 자장, 자하, 자유는 서로 논쟁도 하고 비난도 한다.
증자는 유일하게 “子”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내용에서도 보면 3장중 2장이“吾聞諸夫子(내가 선생님께 들은 말로는)”로 시작함으로 은근히 공자님의 적통임을 비치고 있다. 아마 증자의 문인들이 강력하게 “子”라는 호칭을 고집했을 것이다.

제자들 중에 실세는 아마도 자공의 문인들인 듯하다. 자공은 공자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공자가 죽은 이후에 6년 동안 상례를 치렀다고 하며 현실적으로도 성공하였으니 가히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했을 것이다.

자공과 그의 제자들인 공손조, 숙손무숙, 진자금이 등장하여 대화하는 가운데 자공에 대한 존경의 마음들이 대단하다. 그러는 가운데 자공이 공자를 더욱 높이니 공자의 권위와 자공의 권위가 더불어 상승한다.

子張 1장  子자張장曰왈: 「士사見견危위致치命명, 見得견득思사義의,祭제思사敬경,喪상思사哀애, 其기 可가 已이矣의. 」 (자장 왈 “선비는 위태한일에 대해서도 명령을 수행하며, 이익을 보면 먼저 그것이 의로운 것인가를 생각하고, 제사에서는 경건하고, 상사에서는 애통해야 한다. 이정도면 가한 것이다.”)

선비는 하급 지도자 이니 명령을 내리는 이라기보다는 받는이다. 하급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군에 대한 忠誠(충성)이다. 편안하고 안전한 일만 하고자 하는 이라면 결코 충성된 이라 할 수 없다.

선비도 먹고 살아야 하니 충성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 대가가 의로워야 한다. 혹 그의 충성이 범죄 하는 것이고 범죄자에게 충성하는 것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선비는 주군을 섬기되 먼저 그가 의로운 이임을 살피고 의롭다 여기면 목숨을 바쳐 충성 할 것이다.

제사를 지냄과 문상에서의 애도표현이 자칫 형식적인 것이 되기 쉽다. 선비는 이러한 제례와 상례에 있어서 진정으로 임해야 하듯이 매사에 진실하게 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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