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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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잔치는 끝났다.
  • 김홍한
  • 승인 2015.07.07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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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신학 138호, 청년들이여 !

대한민국, 잔치는 끝났다.

 나름대로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서 각 왕조의 흥망성쇠에 감이 잡힌다.

 고구려, BC 37년 건국하여 광개토왕과 장수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후 동북아의 강국으로 위용을 자랑했지만 668년 당나라에 멸망함으로 705년의 역사를 마무리했다.

   

 백제, BC 18년 건국하여 한성을 도읍으로 하여 493년, 웅진에서 63년, 부여에서 122년의 역사다. 한성에서는 근초고왕 때가 전성기요 웅진에서는 무령왕 때가 전성기였다. 부여에서는 위덕왕 때부터 마지막 의자왕 때까지 나름대로 강력한 나라를 유지했으나 안타깝게 660년 당나라에 멸망함으로 678년의 역사를 마무리 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매우 안타까움이 있다. 아직 나라의 힘이 충분히 있었는데 전쟁에 패함으로 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쉬워서 고구려와 백제가 망한 후에는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었고 고구려의 경우는 발해가 그 뒤를 이었다.

 신라, BC 57년 건국하여 지증마립간 때부터 진흥왕 때까지 전성기를 이루었다. 삼국통일 후, 새롭게 시작된 신라는 경덕왕 때 전성기를 이루고 마지막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나라를 바침으로
992년의 역사를 마무리 하였다.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통일왕국을 이룰 수 있었던 힘은 젊음이다. 물론 당나라라는 강대국의 힘이 결정적이었지만 신라는 젊은 나라였다. 역사가 짧아서 젊은 나라가 아니다. 사람들이 젊었다.
신라는 화랑의 나라였다.

 고려, 918년 건국하여 11대 문종 때부터 17대 의종 때까지 100 여년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벽란도에는 세계 각국의 상선들이 운집했고 나라의 문화도 크게 융성했다. 이후 무신 난, 원나라의 지배하에 고통의 기간을 보냈다. 공민왕 때 이르러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주저앉고 말았다.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 3년인 1392년, 고려는 474년의 역사를 새나라 조선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 1392년 건국하여 4대 세종 때부터 9대 성종 때 까지 70여년이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1592년)과 정묘호란 (1627년)으로 조선은 망한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제 2의 조선이 다시금 시작해서 21대 영조와 22대 정조의치세인 70여년의 전성기를 이루고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김으로 조선은 518년의 역사를 마무리 하였다.

 신라, 고려, 조선의 망함에는 공통점이 있다. 나라가 충분히 늙어서 망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을 때는 부흥군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었는데 신라와 고려, 조선이 망했을 때는 부흥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조선이 망했을 때는 독립운동은 있었으되 조선왕조를 다시 일으키자는 운동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해방되었을 때는 아무도 조선왕조의 부활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조선이 망할 당시에도 조선은 가난했는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너무나도 많이 착취당했다. 일제는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다 빼앗아 갔다. 예배당 종도 떼어가고 가정집의 숟가락 젓가락도 빼앗아 갔으니 오죽했겠는가? 게다가 1950년 한국전쟁은 남아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조선의 정조대왕이 서거하신 1,800년, 그 후 150년 동안 조선의 민중들은 극한의 삶을 살아왔다. 한국전쟁이 끝난 대한민국의 형편은 극한의 극한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한민국, 더 이상
가난할 수 없을 만큼 가난했다.

 “한국전쟁은 몽둥이였다. 잠자고 있었던 조선, 무참히도 짓밟히고 무참히도 빼앗겨서 꿈도 희망도 잃고 생명부지의 의지마저도 상실하였던 조선, 가까스로 일본에게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또 다른 지배자 미국에 의하여 우리의 정신이 솟아날 싹이 잘리고 도무지 소망이 없이 말라 죽어가고 있던 이 땅에 한국전쟁은 가혹한 채찍이고 몽둥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 이던지 해야 했다. 여인들은 몸을 팔고, 남정네들은 목숨도 기꺼이 팔았다. 자존심도 팔고 자식도 팔았다. 무엇이든지 살기위해서는 다 팔았다. 한국전쟁은 얼빠진 얼간이에게 준 역사의 얼차려였다.

 한국전쟁의 결과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의견이 분명한 이들이 죽었다. 그리고 독 오른 지도자들과 멍청이들만 남아서 역사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독기가 남북의 골을 더욱 깊고 깊게 만들었으며 그 원한의 분풀이를 베트남에 가서 풀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을 정신병에 시달리게 했다. 남북이 서로에 대해서 엄청난 증오를 품었다. 때로는 증오심이 삶의 역동성이 된다. 그 증오심이 국가 목표가 되고 삶의 의미가 된다. 복수하기 위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요 행복하게 살기위해서가 아니라 원수 갚고 승리하기 위해서가 목표이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의 윤리의식을 바꾸었다. 사람은 마땅히 사람답게 살아야 하건만 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다. 짐승처럼 이라도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던지 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 살인했다.”, “살기 위해서 몸을 팔았다”, “살기 위해서 인육을 먹었다.”, “살기 위해서 자식을 버렸다.”, “살기 위해서 동료를 배반했다” 이 “살기 위해서…”라는 처절한 명분에 모든 것이 묵인되고 용서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어느덧 우리 민족의 눈에서는 반짝 반짝 빛이 났다. 지혜의 빛이 아니다. 창의력의 빛도 아니었다. 지옥훈련을 받고 휴가 나온 특수부대 병사의 눈빛이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절체절명의 때에 얻게 되는 야수의 눈빛이었다. 더 이상 조선말기의 흐릿한 눈이 아니었고 일제치하의 체념의 눈도 아니었다.

 북조선의 경우는 어떠한가? 남조선을 해방시키고자 일으킨 민족 해방전쟁이었지만 명분도 의기심도 첨단 신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폭탄 속에 온 국토가 초토화 되었다. 사람 사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도록 파괴되었다. 미국인들은 북조선이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했다.

북조선의 많은 이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왜 피난 내려왔나? 역시 살기 위해서 내려왔다. 친일파 사람들은 북조선의 친일파 숙청에 재산을 빼앗기고 지위도 빼앗기도 목숨도 위태로워서 내려왔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는 다는 명분으로 내려왔다. 일반 민초들은 미군의 가공할 폭격과 핵폭탄의 공포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려왔다. 고향을 등지고 내려온 그들은 살기위해서 남한의 사람들보다 더욱 극성스러워야 했다. 더욱 극성스럽게 반공했고 더욱 극성스럽게 친미 했고, 더욱 극성스럽게 종교적이었다.....” - 이야기 신학 9호 중에서 -

 어느덧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났다. 혹자는 박정희가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어림없는 말이다. 150년 동안 짓눌려 있던 민중들이 기지개 켜고 일어서서 전쟁같이 극성스런 삶을 살면서 이루어낸 것이다.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그동안 괄목할만한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상당부분 사상누각이었다. 관치경제, 재벌경제, 정경유착, 부정부패, 과도한 부채는 터질 시각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때 대한민국은 망할 위기였다. 이 땅의 민중들은 피땀 흘려 노동했는데 저 친일파의 후예들이 그 노동의 열매를 따먹더니 나라를 파탄지경에 빠뜨린 것이다.

 하늘이 도왔을까? 탁월한 지도자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서 기사회생했다. 그리고 연이은 노무현 대통령 때 대한민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많은 이들이 말한다.  “대한민국이 이제 국운 융성의 때가 온다”고,  그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한다. “대한민국의 전성기는 끝났다.”

 전성기가 지나고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구통계로 명확하게 나타난다. 1971년생이 102만 명 출생으로 정점을 찍었다. 71년생이 지금 44세로 가장 왕성하게 경제활동을 할 나이이니 지금의 우리나라가 그만큼 경쟁력이 크다는 얘기다. 그 후로 점점 줄더니 2002년생 부터는 50만 명을 밑돌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다. 젊은이들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사회라는 것 자체가 재앙이다. 이대로 가다보면 우리나라는 멸망을 면치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국인 이주자들이 그 공백을 상당부분 보충할 것이다. 

 외국인 이주자가 많아지는 만큼 우리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된다. 장차 우리사회는 정체성에 큰 변화가 불가피하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에 함락됨으로 2,200년 역사의 로마가 멸망했다. 로마 멸망의 원인이 무엇일까? 나는 좀 엉뚱한 데서 그 원인을 찾는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100여 년 전, 콘스탄티노플에 흑사병이 창궐했다. 그 흑사병으로 콘스탄티노플 인구의 88%가 죽었다. 그 빈자리를 이주민들이 빠르게 차지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주민이 바뀌면서 정체성도 바뀌었다. 로마는 그 때 이미 멸망한 것이다.

 인구감소와는 별개로 또 하나의 망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를 통해서 그것을 본다. 이 두 사건은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의 사악함과 무능함에 분노가 아니라 가슴이 무너지는 절망감이 몰려온다.

 조선 말, 외국인이 본 조선 이야기 속에서 망조든 나라의 모습을 보았다. 무너진 성벽을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그 병사들이 며칠만 수고하면 성벽을 수리할 수 있을 것인데 수리는 하지 않고 허구한 날 지키고만 있었다.

 망조가 든 나라이기에 그렇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그래서 성벽을 수리할 책임자가 없었다. 의지도 없었다. 성벽도 수리하지 못하는데 나라를 어떻게 유지할까? 조선은 그렇게 망했다.

유일한 희망이 있는데...

 “대한민국의 전성기는 끝났다”, “인구가 준다”, “국가 기강이 무너졌다” 희망은 없는가?

 예부터 나라를 새롭게 하는 좋은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수도를 옮기는 일이다. 수도를 옮김으로 나라의 권력구조가 바뀌어 나라가 새로워 질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 결과 권력구조는 조금도 변화된 것이 없이 그저 행정력의 분산만 가져왔다.

 또 하나,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은 ‘전쟁’이다. 예부터 수많이 써먹었던 수법이다. 그런데 전쟁은 권력자들에게는 나라를 새롭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조치이지만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다. 정말이지 전쟁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되는 끔찍한 일이다.

 또 하나, 나라가 새롭게 되는 것은 ‘강력한 영웅의 등장’이다. 어떤이 말하기를 “영웅이 없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 라고 했는데 서글픈 이야기다. 내 생각에는 “영웅이 없는 시대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불행한 시대”다. 민주사회에서는 영웅이 필요 없던지 모두가 영웅이다. ‘강력한 영웅’이란 독제자다. 독제자의 등장은 득보다 실이 훨씬 많다.

 나라를 새롭게 하는 것, 국운융성의 때를 맞이하는 것, 우리에게는 너무 확실하고 너무 절실한 방법이 있다. 통일이다. 통일하면 정말 이 나라는 새로워져 세계 속에 우뚝 서서 세계를 이끄는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도 그것을 잘안다. 그래서 “통일 대박”을 말하지 않았던가?

 알긴 아는데 거꾸로 간다. 알면서도 거꾸로 가니 더욱 안타깝다.  희망은 있으되 그 희망이 흐릿하다.

 * 이 글을 쓰고 있는 2015년 6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발동과 함께 정치권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적반하장이다. 周易(주역) 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삼태기를 짊어질 사람이 수레를 탔다.(負具乘)” - 解卦 3爻 -

 아! 대한민국, 잔치는 끝났는가?

청년이여!

희망을 잃은 대한민국,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에게 염치없지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왜 대한민국이 희망을 잃었는고 하니 살기 위해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출세를 위해서 정의로움을 버렸기 때문이다. 옳은 것을 옳다 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청산을 하지 못했고 불의한 권력과 불의한 재물에 눈감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짓고 그 죄를 씻기 위해서 12가지 과업을 수행한다. 그중 아우게이아스왕의 외양간을 하루 만에 청소하는 일이 있었다. 그 외양간은 3천 마리의 소를 수 십 년 동안 키우면서 한 번 도 청소하지 않은 외양간이었다. 외양간을 청소해 주는 조건으로 헤라클레스는 소의 1/10을 요구했다. 아우게이아스왕은 동의 했다. 대신 하루 만에 치우지 못하면 헤라클레스를 종으로 삼겠다는 조건이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계약에 증인을 세우기로 하였다. 누구를 증인으로 세울까? 제 아무리 헤라클레스라 할지라도 하루에 그 많은 소똥을 치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 아우게이아스왕은 절대로 어길 수 없는 맹세로 스튁스강을 증인으로 하던지 제우스신을 증인으로 하자고 한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그럴 필요가 없이 아우게이아스 왕의 아들 퓔레우스를 증인으로 하자고 한다.

 아우게이아스왕은 어이가 없었다. 퓔레우스는 자신의 아들이니 공정한 증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는 말했다.

 “퓔레우스 왕자는 젊습니다. 그러니 그의 양심도 젊습니다.  젊은 양심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증인입니다.”

 헤라클레스는 외양간의 벽을 헐고 그곳으로 인근을 흐르는 두 강의 물줄기를 바꾸었다. 거센 강물은 그 많던 오물을 순식간에 쓸어 갔다.

 교활한 아우게이아스왕은 약속을 이행할 뜻이 없었다. 아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퓔레우스 왕자의 젊은 양심은 아버지의 뜻에 동의 할 수가 없었다. 분노한 아우게이아스왕은 헤라클레스와 함께 아들도 쫓아냈다. 물론 왕위계승권과 상속권도 빼앗았다.

 아! 젊음이여, 순수하여라. 정의로워라. 비록 그 아비는 불의하고 교활하여도 아들의 젊음이 그것을 이기는구나. 젊음의 특권은 아름다움과 패기가 아니다. 정의로울 수 있음이 특권이다. 불의를 거부 할 수 있음이 특권이다. 아버지는 더없이 추악한 인간이지만 아들은 더없이 맑고 순수하구나.

 청년이여, 대한의 청년이여, 어리석고 무능하고 간사한 기성세대는 그대들에게 조국의 암담한 미래를 떠넘긴다. 아름답고 유능하고 정의로운 그대들이 일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그나마 찾은 일자리라는 것들이 박봉에 허접한 일자리가 대부분이구나.

 청춘남녀가 때가 되면 짝을 이루어 새 세대를 생산해야 되건만 그것마저 박탈당한 세대여, 일자리가 없어 짝을 이루지 못하고, 거할 곳이 없어 짝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청년들이여 기성세대를 용서하지 마라. 그리고 기성세대의 추함을 거울삼아라. 아무리 어려워도 청년의 특권인 정의로움을 포기하지 말라. 그 정의로움으로 말미암아 퓔레우스 왕자처럼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희망이 구체화 되는 새 세상을 이루는 힘이 될 것이다.

- 논어 읽기 -

陽貨 23장 子路자로 曰왈: .君子군자 尙상 勇용 乎호? . 子曰자왈 : .君子군자 義의 以이 爲위 上상. 君子군자 有유 勇용 而이 無무義의 爲위 亂난, 小人소인 有유 勇용 而이 無무 義의 爲위 盜도. (자로 왈 “군자는 용맹을 숭상합니까?” 공자 왈 “군자는 의로움을 더 숭상한다. 군자가 용맹이 있으되 의롭지 않으면 난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맹이 있으되 의롭지 못하면 도적이 된다.”)

 양화 8장에서도 공자는 자로에게 “好勇不好學, 其蔽也亂”(용기를 좋아하되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면 난폭해진다.)고 했다. 의롭지 않은 이가 군자일 수 있을까? 통 큰 사람일 수는 있어도 군자일 수는 없다.

24장 子貢자공 曰왈: .君子군자亦역 有유 惡오 乎호? . 子曰자왈: .有유 惡오: 惡오 稱칭 人인 之지 惡악者자, 惡오 居거下하 流류 而이 .산 上상 者자, 惡오勇용 而이 無무 禮례 者자, 惡오 果과 敢감 而이 窒질 者자.. 曰왈: .賜사 也야 亦역 有유 惡오 乎호? . .惡오 .요 以이 爲위 知지 者자, 惡오 不불 孫손 以이 爲위 勇용 者자, 惡오 .알 以이 爲위直직 者자. . (자공 왈 “군자도 역시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 왈 “있다. 남의 약점을 비방하는 이를 미워하고,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이를 미워하고, 용기 있으되 무례한 이를 미워하고, 융 통성이 없으면서 과감한 자를 미워한다.” 또 말하기를 “사야 너도 미워하는 바가 있느냐?” 자공 왈 “훔쳐보고는 아는 척 하는 것을 미워합니다, 불손한 것을 용기로 아는 자를 미워합니다, 남의 단점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하다고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공자가 미워하는 바가 있고 자공도 미워하는 바가 있는데 나도 미워하는 바가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자신의 이익에 따르는 이를 미워한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을 책임지지 않는 이를 미워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를 미워한다. 사람은 마땅히 사람다워야 할 것인데 사람답지 못한 이를 미워한다.

26장  子曰자왈 : .年년 四사 十십 而이 見견 惡악 焉언, 其기 終종 也야 已이. .(공자 왈 “40세가 되도록 잘못이 보이면 그야말로 끝이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필자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천명이 훌쩍 넘도록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地位를 얻지 못함은 물론이요 修身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안정된 수입을 얻지 못함으로 齊家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사회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인물이고 가정에서는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아비일 뿐이다. 부모에게는 늘 근심과 걱정을 끼치고 있으니 불효하기 이를 데 없다. 아직도 때를 기다린다고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들었다.
군자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이대로 늙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필자와 같은 이를 공자께서 보시면 무어라 할까? 혹시 정강이를 걷어차며 “원양 같은 놈”이라고 하지나 않을까?

글쓴이 김홍한님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원내로 39번길 59 (한국기독교장로회)새교회 목사(☎ 010-3243-2665 E-mail: khhyhy@hanmail.net 후원계좌 / 농협 453047-52-043161 김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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