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의 영성(대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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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영성(대학을 중심으로)
  • 김홍한
  • 승인 2015.05.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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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인문학에 길을 묻다 4강 -2
유가의 영성(大學을 중심으로) 대학은 공자(孔子:BC 551~479)와 그의 제자 증자(曾子)가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간략한 유교 경전입니다. 수세기 동안 유교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예기 禮記〉의 한 편으로만 전해져왔으나, 12세기 철학자 주희(朱熹)가 4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독립간행함으로써 유명해졌습니다.
   
* 어려서는 小學을 배우고 청년기에는 大學을 배웁니다. 小學은 사람이 알아야 할 기초적인 행실과 예절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大學은 儒敎의 入門書라 할 수 있습니다. 대학 다음에는 論語를 배우고 다음에는 孟子를 다음에는 中庸을 배웁니다. 中庸은 形而上學的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유영모선생은 말했습니다. “글을 읽고 뜻을 들으면 아주 쉬운 것 같은데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大學은 어렵다.”

* 대학은 大人, 君子가 되고자 하는 학문으로 그 요지는 3강령 8조목입니다. 3강령은 明明德, 親民, 止於至善입니다. 8조목은 格物, 致知, 誠意, 正心,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입니다. 대학은 이 3강령과 8조목에 대한 해석입니다. -----

明德을 밝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명덕은 스스로 밝히는 것, 가장 근본적인 것을 自明한 것, 명덕이 그러한 것입니다. “왜 사느냐?”, “왜 학문을 하느냐?” “왜 하늘을 공경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은 답이 없습니다. 生命(생명)은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는 것, 그래서 그냥 사는 것이지요. 학문을 하는 이유도 그러합니다. 사람은 마땅히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다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벗어난 것입니다. 식색은 자연스러운 것이되 통제되지 않으면 야만입니다. 사람다움이 아닙니다. 통제된 자연스러움, 그것이 문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공경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하늘 공경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왔기에 하늘이 준 거룩한 본성이 하늘공경입니다. 본래의 것을 밝히는 것, 그것을 나는 “明明德”이라 합니다.

親民(친민)은 新民입니다.

신민은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인데 백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성과 친해야 합니다. 친하지 않고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은 새로워 지지 않으면서 남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독재자가 하는 일이지요. 결코 아무것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시경에는 “周雖舊邦 其命維新/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이나 그 명은 오직 새롭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유신”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止於至善(선에 이르러 그친다)이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善에 이른다는 것은 어진 이를 어질게 대하고 친한 이를 친하게 대하는 것(君子賢其賢而親其親)입니다. 군자는 그렇게 처신합니다. 그러나 소인은 저 좋은 대로 행하고 제 이익되는 대로 행합니다. 선에 이르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切磋琢磨(절차탁마)해야 합니다. 절차탁마란 ‘깍은듯 다듬은듯하고 쪼아 놓은듯 간듯하다’는 것으로 ‘깎은듯 다듬은 듯하다’는 것은 배움을 말하고 '쪼아 놓은듯 간듯하다'는 것은 스스로 닦음을 말합니다. 즉 절차탁마하여 선한이를 선하게 친한이를 친하게 대하는것, 그것이 선에 이르는 것이지요.

知本(근본을 안다)는 것은 참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근본을 알면 말단은 저절로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務本/무본) 그리고 끝내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報本/보본)

格物致知(격물치지)는 학문하는 방법입니다.

格物이란 사물을 접하는 것이고 致知는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즉 격물치지란 사물을 접하여 안다는 것인데 그냥 아는 것은 아니지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이러합니다. 먼저 자신이 아는 것을 발판으로 거기에 더욱 보태고 탐구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힘써 노력하면 豁然貫通(활연관통/확 트이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격물치지가 경험론적 인식론이라면 활연관통은 관념론적 인식론입니다. 경험론과 관념론은 인식론의 두 축입니다. 유학이 격물치지를 중시한다면 불교는 활연관통을 중시합니다. 유교중에서도 양명학이 활연관통을 중시한다면 주자학은 격물치지를 중시합니다. 불교중에서도 禪宗이 활연관통 쪽이라면 교종은 격물치지 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험(經驗)과 觀念(관념)이 철학의 열쇠이다. 실체(實體)냐 관념(觀念)이냐가 신론(神論)의 핵심이다. 이(理)와 기(氣)가 주자학의 논쟁이다. 이(理)와 심(心), 격물치지(格物致知)와 활연관통(豁然貫通)에서 주자학과 양명학의 관심이 나뉜다. 법(法)이냐 각(覺)이냐로 불교의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나뉜다. 율법(律法)이냐 복음(福音)이냐 로 유대교와 기독교가 구별된다. 가톨릭교회는 교리에 강조점을, 개신교회는 성서에 강조점을 둔다. 보수와 진보, 좌익과 우익은 역사발전의 두 축이다. 이러한 논쟁들은 결코 공리공론이 아니다. 모르는 이들, 관계없는 이들에게는 중요하지 않겠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진리에 도달하는 열쇠이니 죽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크게 강조되면 진리체계는 기울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당파성을 갖는 것은 당연하나 군자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여 조화로움을 잃지 않는다.(자로 23장)

誠意와 愼獨(신독) “誠其意”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 군자는 필히 愼其獨합니다.

소인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어떠한 상태에 있던지 스스로가 참되고자 하는 이가 군자입니다. 그것이 愼獨(신독)입니다. 그러면 心廣體胖(마음은 넒어지고 몸은 편안)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 기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제멋대로, 제욕심대로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죽을병 걸린 사람이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만큼 간절한 기도는 없을 것이다. 간절한 기도이되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죽음을 거부하는 불신앙의 기도이다. 誠其意 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도를 할 수 있다. 간절한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평생 한 두 번의 간절한 때는 있을 수 있다. 우리의 기도가 진정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되려면 간절하기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참된 기도여야 할 것이다. 참된 기도라면 그 기도가 혹 원망의 기도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칭찬하실 것이다. 시편의 기도 중에는 원망의 기도가 적지 않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가 진실하고 참되었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는 정말이지 힘든 기도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다. 때문에 감사하지 않으면서도 감사하다고 하고, 용서하지 못하면서도 용서한다고 한다. 주님을 믿지 못하면서도 믿는다고 한다.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진정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특히 자신의 진면목을 아는 것은 더욱 두렵고 심히 당황되는 일이다. 미국의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혼자 지내는 것이 건전하다고 본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같이 무리를 이루고 있더라도 곧 싫어지며 지쳐 가게 마련이다.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신독이라는 말을 두고 쓴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나는 고독을 즐긴다 깊은 밤 문득 시계소리만 방안을 진동하는데 그 소리가 참 낯설다. 나 있는 곳은 밤이면 지극히 깊은 적막 밀폐 잘되는 이중문이 멀리 개짓는 소리도 막는구나. 엊그제, 벗을 만나 나눈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직까지도 생각을 흐려놓고 있어 마음을 진정코자 마당에 나가니 하늘이 몹시 시끄럽다. 무수한 별들이 마구 말들을 쏟아 내는데 어찌하여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가? 숱한 인간의 언어 속에 살다보니 자연의 언어에는 귀가 막혔나보다. 아! 홀로된다는 것, 대부분의 민초들에게 홀로되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다. “이별보다 더 아픈건 외로움…”이라는 노랫말이 마음에 저린다. 노랫말은 민초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어디 그 정서가 오늘날만의 정서겠는가?

언제나, 어느 민족에게나 민초들의 정서는 같다. 홀로 된다는 것은 깊은 두려움 그러나 외로움이 사무쳐야 그리움이 사무친다. 그리움이 사무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

수년전 나를 잘 아는 지인이 “목사님은 고통을 즐기는 것 같아요” 했는데 어찌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즐긴다. 만남은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만남이 많은 삶은 얄팍한 삶이다. 많은 사람을 아는 것을 자랑하고, 그 관계 속에 존재감을 느끼는 이들은 홀로설수 없고 홀로서기를 두려워하는 소인배다.

분주한 삶은 가벼운 삶, 학자가 분주하면 학자가 아니다. 고독 속에 학문에 정진할 수 있어야 학자다. 목사가 분주하면 목사가 아니다. 고독 속에 기도하고 명상하고 성서를 묵상할 수 있어야 목사다. 외로움은 삶을 깊게 한다. “골방에 들어가라”는 말씀은 외로워지라는 말씀이다. 외로워야 별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외로워야 곡식이 영그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외로워야 죽어가는 짐승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외로워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외로워야 하기에 초대교회 교부들은 사막으로 갔다. 수도원의 높은 담장 속에 숨었다. 불교의 선승들은 골방에서 면벽했고 유가의 선비들은 愼獨(신독)했다.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 가셔서 기도를 하셨다. (눅5장) 그러나, 함부로 외로우려 하지 말라 상대 없는 싸움에 섣불리 덤비다간 미쳐버린다. 

正心修身에 대한 해석 이른바 수신은 정심에 달렸다고 합니다.

분노가 있으면 바름을 얻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있어도 바름을 얻을 수 없습니다. 쾌락을 좋아해도 바름을 얻지 못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어도 바름을 얻지 못합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그러니 수신은 마음을 바르게(正其心) 하는데 있습니다. 

修身齊家에 대한 해석 사람은 마땅히 좋아하면서도 그의 나쁜점을 알며 미워하면서도 그의 좋은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지요. “사람은 자기 자식의 나쁜점을 모르고, 자기 곡식의 싹이 큰 것을 모른다.” 그러니 修身이 되지 않으면 齊家는 불가합니다. 수신이 된 사람은 나와 다름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가족의 다름은 물론이요 모든이의 다름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공자 말하기를 “군자는 같지 않더라도 화합하나 소인은 같으면서도 불화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논어 자로 23장 또 이르기를 “군자는 긍지가 있되 싸우지 아니하고 함께하되 당 짓지 아니한다.(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논어 위령공 21장 김교신은 사도신경을 그대로 믿는 정통 신앙인 이었다면 유영모는 사도신경을 거부하는 비정통 신앙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신과 유영모는 서로 흠모하고 아끼는 지극한 관계였다. 

齊家治國에 대한 해석 효도하면 나라를 섬기는 방법이 되고, 공손하면 어른을 섬기는 방법이 된다.

자애로우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된다.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如保赤子(여보적자)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보적자란 갓난아이 보호하듯 하는 것입니다. 제 안에 恕를 간직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깨우치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철없는 젊은 엄마가 갓난아이를 키우는데 경험이 없어서 전전긍긍합니다. 오직 하나 있다면 아기를 끔찍이 사랑하는 그 맘 하나가 있습니다. 그 맘으로 엄마는 아기를 키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정치인들은 여러모로 유능한 분들입니다. 특히 대통령은 참으로 대단하여 그 능력이 여러모로 검증된 분입니다. 과거의 경력, 당내에서의 지도력, 강력한 추진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제도적으로 얼마든지 유능한 인재들을 들어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대통령의 실수를 막기 위해서도 여러 가지 법적인 안전장치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능력 보다도 여보적자의 마음이야말로 지도자의 가장 큰 덕목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여보적자의 모습을 보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곰이나 사자에게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양떼를 지켰습니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켜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떼에 달려들어 한 마리라도 물어가면, 저는 곧바로 뒤쫓아가서 그 놈을 쳐죽이고, 그 입에서 양을 꺼내어 살려 내곤 하였습니다. 그 짐승이 저에게 덤벼들면, 그 턱수염을 붙잡고 때려 죽였습니다 ….” (왕상 17:34~ )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바로 그 모습을 보셨을 것입니다. 저렇게 양떼를 목숨 걸고 지킬 수 있는 이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맡길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제가라는 것은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현의 삶을 보면 제가라는 것에 의문이 듭니다. 공자, 석가, 예수는 제가했을까? 공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아들 백어가 있는데 그에 대해서도 특별한 가르침이나 애정을 준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 안회에게는 한없는 애정을 쏟고 안회가 죽었을 때는 심한 슬픔에 통곡했는데 아들 백어가 죽었을 때는 별 반응이 없습니다. 석가는 부모와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또한 어머니 마리아와 의붓아버지 요셉에게서 자랐습니다. 예수님은 의붓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 거의 말씀하신바가 없고 동생들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제가할 것도 없습니다. 한술 더 떠서 예수께서는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마10:35-37)고 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을 따라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족이란 마땅히 사랑하고 돌보아야 할 가장 가까운 이웃임에는 틀림없으나 진리와는 별개라는 생각입니다. 참 부모는 육신의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입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 그 이상일 수 없습니다. 가족이기주의에 집착해서 진리에서 멀어진다면 그 때 가족이란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 원수일 수 있습니다. 유가 사람들이 이 齊家(제가)라는 말에 붙들려 가족이기주의에 사로잡히고 가문을 지나치게 중시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족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쓴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나는 자유를 거부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 주변의 모든 것과 관계하면서 존재합니다.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바란다면 지금의 관계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지금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유는 홀로됨이고 고독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함부로 할 것이 아닙니다. 부부 중 누가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이혼하자는 이야기 입니다. 자녀가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가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부하직원이 자유하고 싶다고 하면 직장을 그만 두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자유다”는 선언은 이제 내가 너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이야기이고 너는 나와 관계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이가 나를 속박합니다. 부모형제가, 처자식이, 사랑하는 이웃이 한없이 나를 속박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소유한 사람은 그 소유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로 피조물에게 속박당하고 계십니다. 자유 하고자 하는 이들이 불교 승려들인데 부모도 버리고 처자식도 버리고 일체 무소유로 살겠다는 이들입니다. 불교 승려들 중에 정말 그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단언컨대 그러한 이는 없습니다. 혹 있다면 참으로 무책임하고 모진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하겠다고 모든 것 훌훌 털고 자유 찾아 떠난다면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니까요. 자유하려면 버려야 합니다. 권력으로부터 자유하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려면 무소유 해야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려면 죽어야 합니다. 참 황당하게도 나는 이러한 식의 자유는 거지와 노숙자에게서 봅니다. 자유의 대가가 그것입니다. 어떤이가 나에게 말합니다. “김목사는 참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도 자유하지 못하신데 어떻게 감히 내가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자유인은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자유를 거부합니다. 아주 작은 자유를 누리려고 해도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글을 쓰는 것도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많은 부분 포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구지 자유가 있다면 생각의 자유입니다. 생각은 우주 이 끝에서 우주 저 끝까지를 순간에 오고갑니다.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와 깊은 바다 속을 마음대로 오고갑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그 이전부터 종말까지를 순간에 오고갑니다. 그리고 생각으로는 살인도, 간음도, 도둑질도 모두 가능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도 가능하고 배교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어쩌지요? 생각도 자유하면 안됩니다.

옛 성현들은 愼獨(신독)하라고 가르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아! 그러니 생각의 자유도 없습니다. 생각의 자유도 박탈당한 것입니다. 나는 적어도 생각은 자유하고 싶은데말입니다. 자유가 억제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자유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것은 나의 자유가 확대될 수록 누군가가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자유”를 포기했습니다.

10.治國平天下에 대한 해석 노인을 노인답게 대우하면 백성들은 효성스럽고 어른을 어른답게 대우하면 백성들은 공손하며 외로운 이들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들은 배반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군자는 絜矩之道를 지니고 있다. 혈구지도란 위에서 싫어하는 것을 아래에 시키지 않고 아래서 싫어하는 것으로 위를 섬기지 않는다. 앞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뒤에서 먼저 하지 않고 뒤에서 싫어하는 것으로 앞에서 따라하지 않는다. 오른편에서 싫어하는 것을 왼편에 건네지 않고 왼편에서 싫어하는 것을 오른편에 건네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혈구지도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백성의 부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克配上帝(극배상제/자신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짝한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게 되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덕을 쌓아야 한다. 덕이 있으면 사람이 따르고 사람이 따르면 땅이 따르고 땅이 따르면 재물이 따르고 재물이 따르면 쓰임이 따릅니다. 덕이라는 것은 근본이고 재물은 말단입니다. 근본을 어기고 재물을 택하면 백성들은 다투어 약탈을 하게 됩니다.

天命(천명)이란 항상된 것이 아닙니다. 선하면 얻고 선하지 못하면 잃는 것이 천명입니다. 천명은 선을 따르는 것, 이 세상에서 보배로 삼을 것은 오직 선을 보배로 삼아야 합니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현자를 보고도 등용하지 못하고 등용하더라도 중용하지 못한다면 태만한 것입니다. 불선한 이를 보고도 물리치지 못하고 물리치더라도 멀리하지 못한다면 잘못입니다. 남이 싫어하는 바를 좋아하고 남이 좋아하는 바를 싫어하는 것, 이것을 일러 ‘사람의 본성을 어기는 것’이라 하나니, 재앙이 필시 자기 자신에게 미치고야 말 것입니다.

재물을 생산하는데도 대도가 있는법, 생산하는 사람은 많고 소비하는 사람은 적고 생산하는 사람은 바쁘게 움직이고 소비하는 사람은 천천히 하면 재물이 항상 풍족하게 마련입니다. 인자는 재물을 베풀어서 자신을 세우고 불인자는 자기를 망가뜨리며 재물을 모읍니다. 위에서 인을 좋아하는데 아래서 의를 좋아하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맹헌자가 말했습니다. 馬乘(네마리가 끄는 마차)을 기르는 이는 닭이나 돼지 따위를 살피지 아니하고 얼음을 베어 갈 정도의 집안은 소나 양을 기르지 아니하며 백승의 집안에서는 취렴하는 가신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재벌은 골목상권까지...) 이것을 일러 ‘나라는 이익으로써 이로움을 삼지 아니하고 의로써 이로움을 삼는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치국평천하란 무엇일까? 석가의 꿈과 비전은 해탈성불의 세계요, 예수의 꿈과 비전은 하나님 나라라면 공자의 꿈과 비전은 平天下일 것인데 그것은 온 세상에 仁義道德이 실현된 세상을 말하는 것이지 알렉산더나 칭기츠칸 같은 영웅들이 야망을 가지고 힘으로 통일한 평천하가 아닙니다. 大學의 8條目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순서대로 되는 것이라면 참 좋겠지만 수신하되 평천하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요 반면 수신하지도 못하였는데 오히려 평천하 한사람도 있으니 그것이 순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시 순서대로 되는 것이 이상적일 것이니 수신하지 못한 사람이 치국하게 되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고 얼마 되지 않아 그 지위를 잃던지 천하가 전쟁터가 될 것이다. ====

바벨탑을 쌓는 한국 기독교 서양인들이 올림푸스의 신들을 제거했듯이 우리나라 선교초기 기독교인들은 무수히 많은 토착신들을 제거하였다. 신뿐만이 아니라 공자도 죽이고 석가도 죽였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학자들이 어떻게 공자를 죽였을까? 유교의 목표가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라면 공맹은 평천하하지 못했지만 기독교는 평천하했다는 것이다. 기독교국가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평천하로 착각한 것이다. 초기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은 이유는 예수가 공자보다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국가들이 중국보다 강하고 일본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불교는 유교의 박해를 받았다. 그것이 은연중에 석가는 공자보다 약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공자보다도 약한 석가이니 석가는 예수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처음부터 무기력한 석가는 예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렇게 토착신들을 제거하고 공자도 석가도 제거한 한국기독교인들은 이제 하나님께 도전한다. 하늘에 까지 올라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바벨탑이야기는 아주 옛날 성서속의 설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이 땅 에서도 계속된다.

克配上帝(극배상제/ 자신을 이기고 상제에게 짝함) 해야 한다. 마치 바울선생이 말씀하신 “내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다시사셨다”는 말씀을 보는 듯 하다. 박영호선생은 말하기를 “유교의 모든 경전이 없어지더라도 ‘극배상제’ 한 마디만 있으면 유교의 사상은 몽땅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儀監于殷(의감우은/은나라를 거울로 삼다) 해야 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紂(주)는 술로 채운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구워 나무숲 가지마다 걸어 놓고(酒池肉林) 주연을 즐겼다고 했습니다. 흥이 절정에 달하면 신하들과 궁녀들로 하여금 옷을 모두 벗게 하여 난잡한 짓을 하게 했습니다. 불평하는 자는 불로 태워죽였는데 사람이 타죽는 소리를 즐겼다고 합니다. 충간하는 신하들을 죽여 그 몸으로 젓을 담그고 육포를 만들었으니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천명이란 항상된 것이 아니다. 선하면 얻고 선하지 못하면 잃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됨을 잃으면 하늘도 버리고 백성도 떠난다. 得衆則得國(득증즉득국/민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게 되고 민중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고 했다. 주나라를 일으킨 문왕이 한 말이다. 문왕은 정말로 대중의 지지를 얻어 나라를 일으킨 사람이다. 어디 문왕 뿐인가? 새 나라를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 그러하다.

거꾸로 말하면 망한 나라가 대중의 지지를 잃어서 나라를 잃은 것이라 할 수 도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得衆則得國을 추구하지만 종교를 하는 사람은 得眞則得天(진리를 얻은즉 하늘을 얻는다)를 추구해야한다. 종교적 진리를 추구하는이로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는 자는 가짜다. 진리추구에는 대중은 관계없다. 진리를 추구함으로 하늘을 얻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다. 대중을 구하던지 돌보던지 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 혹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서 대중에 대해서 한마디~ 민중은 어리석다. 민중은 일차원적 사고를 한다. 민중은 간사하고 잔인하다. 민중은 어리석기에 권력자들은 항상 민심을 조작한다. 선전선동에 쉽게 속아넘어간다. 예수님도 선전선동에 넘어간 민중들의 고함 속에 죽으셨다. 민중들은 지도자의 작은 배려에 감격하여 순종하고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권력의 공백이 생기면 그 틈을 비집고 폭동을 일으킨다. 그나마 폭동의 지도자가 없으면 즉각 약탈과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른다. 민중 자신들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강력한 권력자를 원하고 거기에 순종한다. 오죽했으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한 레닌도 “소수의 정치엘리트가 필요하다”고 했겠는가? 오늘날 민중들은 많이 성숙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의(義)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이(利)에 따라 움직인다. 이러한 민중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仁과 義보다는 선전과 선동이 효과적이다. 독일의 히틀러가 전문가였다.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히틀러의 방법을 따른다.

올바른 지도자는 민중의 뜻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무엇이 진정 민중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하고 수행하는 자다. 옳은 일이라면 대다수 민중이 반대해도 극복해야 하는 것이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민중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유능한 지도자다. 민중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옳은 지도자가 아니다. 민중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지도자도 옳은 지도자가 아니다. 민중의 생사를 짊어졌기에 그것이 두려운 것이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함이 두려운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민중을 향해 있다는 의미에서만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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