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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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이야기
  • 김홍한
  • 승인 2015.05.1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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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신학과 인문학에 길을 묻다

2강, 論語이야기

사람들이 재미있어하고 흥미로워 하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여자이야기, 전쟁이야기, 돈 버는 이야기, 입지전적 이야기 등이지만 논어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으니 그런 면에서 논어는 참 재미가 없는 책이다.

   
항상 무엇엔가 미혹되어 있는 이들은 논어는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르는 책일 것이다. 논어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웬만한 책들은 그 책을 꼼꼼히 읽어 보면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전들은 그것이 쉽지 않다.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재료를 접하는 것과 같아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만큼 해석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참이 무엇일까? 그것을 한마디로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참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아닌 것을 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하는 식으로 아닌 것을 하나씩 제거하다보면 “이것이다”는 것은 없어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다.

논어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논어가 말하지 않는 것을 하나씩 제거해 봄으로 논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하다. 논어는 忠과 孝를 많이 이야기 하지만 그 충이 우리가 흔히 아는 나라에 충성하는 그 충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孝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공자는 아버지 숙량흘 이야기와 어머니 안씨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참고로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비록 의붓아버지 이지만 요셉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바가 없다.

예수님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밖에는 없다. 석가모니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정반왕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연등불 이래 부처의 계보가 자신의 족보라 했다. 프란체스코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길을 떠났다.

- 儒家는 가족을 매우 중시하는 가르침이라 논어에도 그러한 내용이 많이 나올 것이라 생각하는데 孔子는 아내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함이 없으며 아들에 대해서도 한 이야기가 없다. 아들 백어 와의 대화가 있지만 다른 제자들과의 대화와 다를 것이 전혀 없으니 그냥 스승과 제자와의 이야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공자는 周易의 대가라서 주역의 10익을 썼다 하는데 정작 논어에는 주역의 내용이 전혀 없다. 음양이야기도 없고 卦(괘) 이야기, 爻(효)이기도 없다. 占(점)치는 이야기도 없다. 논어에는 설화나 전설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없다.

혹 신화적 인물을 다루어도 비신화화 하여 이야기 한다. 불교나 기독교의 경전에는 무수히 나오는 기적이야기, 신들의 이야기 등도 전혀 없다. 몸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요즈음 사람들이 마치 복음처럼 생각하는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없다. 장수에 대한 이야기도 없다. 마음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 공자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 큰 가르침을 펼친 석가모니는 마음(心)이야기를 참 많이 했는데 공자는 이상하리 만치 마음이야기가 없다.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요즈음의 책들이 필수라고 여기는 그러한 희망과 비전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소위 우리가 말하는 꿈과 비전이라는 것이 자기 욕심의 표현이요 크게 출세하고자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이니 공자는 그러한 천박한 꿈과 비전을 말할 리 없다.

석가도 그러하고 예수도 그러하다. 석가의 꿈과 비전은 해탈성불의 세계요, 예수의 꿈과 비전은 하나님 나라라면 공자의 꿈과 비전은 平天下일 것인데 그것은 온 세상에 仁義道德이 실현된 세상을 말하는 것이지 알렉산더나 칭기츠칸 같은 영웅들이 야망을 가지고 힘으로 통일한 평천하가 아니다.

중국은 龍의 나라, 가는 곳 마다 용 그림이 있고 수없이 많은 용 이야기들이 있고 주역에도 용이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오지만 논어에는 그 흔한 용 이야기가 없다. 논어에는 서민들의 이야기가 없다. 서민들은 그냥 소인일 뿐이다. 공자는 역사의 주체, 문화의 주체를 군자에게서 찾는다. 논어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이 없다.

사회적 약자인 소위 소인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면 에서 논어는 정의나 평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경제 운영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자연이야기도 없다. 돌, 나무, 물, 불, 하늘 등의 자연에 관하여 이야기 한 바가 거의 없다. 태양이야기 달 이야기도 없다.

공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 생활고를 근심하는 이야기도 거의 없다. 죄를 고민한 이야기도 없다. 공자는 生老病死의 문제, 生活苦의 문제, 罪의 문제들은 天命에 맞기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고민을 했다. 공자라고 어찌 그러한 근심과 걱정, 고민이 없었겠는가 만은 근심해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진작 포기하고 가능한 것을 택한 것이다.

이를테면 “덕이 닦이지 않는 것, 학문이 익혀지지 않는 것, 의를 듣고도 능히 행하지 못하는 것, 좋지 못함을 즉각 바꾸지 못 하는 것” 이런 것을 걱정했다. 자한 28장에서 공자는 “仁者不憂(인자는 근심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어찌 공자인들 근심이 없었겠는가? 공자에게는 누구나 다 하는 근심은 근심이 아니다. 천명과 관련된 일도 근심이 아니다. 그저 순종할 뿐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늘을 본다면 논어를 통해서 나를 돌아본다. 여러 각도에서 나 자신을 본다. 논어를 공부하면서 나 자신을 많이 다듬었다는 생각이다. 내 생각도 많이 커졌다. 논어의 내용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論語 里仁 10장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 (공자왈 “군자는 세상사에 있어서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도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없다. 의를 쫓을 뿐이다.”)

참사람은 세상의 가치관, 통념에 연연하지 않는다. 또한 굳이 그것을 깨뜨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항상 근본으로 돌아가 의에 근거한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참사람은 이데올로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느 특정 이데올로기를 진리로 알지 않는다.(無適也) 목숨 걸고 반대하지도 않는다.(無莫也) 그래서 양쪽으로부터 비난받기 쉽다. 군자는 不偏不黨(불편부당/ 편짓지 않고 당 짓지 않는다)하여 외로울 수밖에 없다.

雍也 11장 子謂子夏曰: 「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 (선생님께서 자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군자유가 되고 소인유가 되지 말라”)

陽貨 13장 子曰: 「鄕原, 德之賊也. 」 (공자 왈 “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적이다.”) * 鄕原(향원/ 대중적 존경을 받는 지역 유지), 군자유는 어떤이 이고 소인유는 어떤이 인가? 儒家의 이상적인 인간상이 군자라면 유학은 군자지학이다.

그런데 군자지학을 배우면서도 군자가 되지 못하고 소인으로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鄕原”이라 했고 맹자는 “似而非君子”라 했다. 似而非란 ‘비슷한데 아닌 것’을 이르는 말이다. 맹자 진심편에 말하기를 “鄕原(향원)은 덕을 해치는 도둑이다. 비난하려 해도 특별히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구실이 없으나 단지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집 안에서는 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밖에 나가 행동할 땐 청렴결백한 척한다. 그래서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고 사람들도 다 좋아하지만 그들과 함께 올바른 도에 들어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이비(似而非)한 것을 미워한다. 말 잘하는 것을 미워함은 그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향원은 대체로 학문을 했으나 道에는 관심이 없고 학문을 수단으로 현세적 명예와 이익의 추구에 급급한 소인이다. 그러나 결코 단순한 소인이 아니다. 율곡 이이는 그의 저서 『聖學輯要』에서 향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탐관오리나 아첨꾼은 소인의 전형으로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겠으나 유독 사이비(似而非)한 인물만은 그 실체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낮 빛은 근엄하고 입은 옳은 소리만 하는지라, 자태와 언행이 참된 군자의 그것과 닮아 있고(似), 근후(謹厚)하여 꼬집어 비난할 데가 없는지라, 온전하고 허물이 없는 군자의 행실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현은 그러한 인물을 더욱 깊이 경계했던 것인 바, 음험하게 세상에 아부하면서도 항상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自以爲是), 속된 무리와 한 패가 되어 무사안일과 저열한 적당주의에 안주함으로써 결국은 이상적 개혁을 실현하려는 선비의 앞길을 저지․방해 하고 나아가 참된 학문의 진로를 두절시켜, 이단의 혹세무민보다 (국가 사회에) 더욱 심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향원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사이비군자가 아닌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소위 군자입네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이비군자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사이비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그렇게 비난하는 순간 자신도 그 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이비라고 비판하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이들이 아마도 기독교인일 것이다. 필자는 기독교인으로서 그것이 부끄럽다. 자기성찰을 진지하게 한다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말이 “사이비”이다.

자한 6장  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 」 子貢曰: 「固天縱之將聖, 又多能也. 」 子聞之, 曰: 「大宰知我乎!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君子多乎哉? 不多也. 」 窂曰: 「子云, 󰡔吾不試, 故藝󰡕 (대제가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성인이신가? 어찌 그리 다능하신가?” 자공 왈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큰 성인이시고 또 다능하십니다.” 선생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대제는 나를 잘 아는 구나 내가 소시적에는 천하여서 비천한일들도 잘했다. 군자는 다능해야하는가? 그렇지 않다.” 금로(자장)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등용되지 않자 재주가 많아서라고 말씀하셨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딱히 잘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인은 진리를 추구하기에 촌각이 아쉬운데 어찌 다능할 수 있겠는가? 이 장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공자께서 소시적에 비천했다는 대목이다. 맹자께서도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났으니 역시 그러하다. 예수께서도 마땅한 거처가 없이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소시적에 목수일을 하셨으니 비천한 신분이었다. 공자와 맹자, 예수의 출생성분이 이러한데 공맹을 숭상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신분의 차별을 두고 또 그것을 제도화했음이 괘씸하다.

옹야 4장 풀이에서 말했듯이 용은 새끼를 낳지 않는다고 했다. 용은 대하장강에서 나지 않고 개천에서 난다고 했다. 공자, 맹자, 예수야 말로 개천에서 난 용이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은 공자의 부끄러운 출생배경을 숨김없이, 아니 오히려 과장해서 기록했다. 숙량흘이 공자를 낳았다고 하면 될 것을 구지 “野合”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예수의 족보(마태복음 1장)를 기록한 마태도 마찬가지 이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했는데 세상에 이러한 족보가 어디에 있는가? “다윗은 밧세바 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하면 될 것을 더 좋게는 “다윗은 솔로몬을 낳았다”하면 될 것을 “우리야의 아내”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분명 다윗의 불륜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의 의도나 마태의 의도는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친구목사가 강대상과 성찬상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어 주었다. 어떤이가 매장에 칸막이를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 주었다.

선배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했는데 수납장을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 주었다. 또 어떤이의 전기공사, 수도공사를 해 주었다. 가까운 친구는 이것저것 고장난것 있으면 가져온다. 그러면 웬만한 것은 내손을 거쳐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나에게 “재주가 많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대답하기를 “내가 천하게 자라서 재주가 많다” 고 응답한다.

사실 나는 천하게 자라지 않았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아쉬운 것 없이 자랐다. 그런 내가 “천하게 자랐다”고 하는 것은 孔子흉내를 내는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내가 소시적에는 천하여서 비천한일들도 잘했다”고 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게 나서 의붓아버지 요셉 슬하에서 자라셨다. 석가는 카빌라성의 성주 아들로 태어났건만 스스로 비구(거지)가 되어 탁발(빌어먹음)로 살았다. 닮고 싶은 이가 있으면 그 비천했던 것 까지도 닮고 싶은 모양이다.

예수의 제자라 하는 이들이여, 예수의 무엇을 닮을 것인가? 예수의 기적행하심을 닮을 것인가? 병치유를 흉내낼 것인가? 권위있는 말씀을 닮을 것인가? 마땅히 그 비천함을 닮아야 할 것이다.

- 논어 추가분 - 認識論(안다는 것(知) 그리스 인들은 근원을 아는 것을 안다고 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고 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라고 했다.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라고 했다. 피타고라스는 “수는 만물의 근본이다”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성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고 했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위정 17장)이라고 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知人).” 안연 22장. 고 했다. 제자 번지가 知에 대해서 묻자 “敬鬼神而遠之(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옹야20장)이라 했다.

祈禱 팔일 13장 … 獲罪於天, 無所禱也.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述而 34장 子疾病, 子路請禱. 子曰: 「有諸? 」 子路對曰: 「有之. 誄曰: 󰡔禱爾于上下神祇. 󰡕 」 子曰: 「丘之禱久矣. 」 (공자님이 병으로 고생하자 자로가 기도하기를 청하였다. 공자왈 “그러한 전례가 있느냐?” 자로가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뢰>에 이르기를 ‘너를 위하여 하늘과 땅의 신께 빈다’ 하였습니다.” 공자왈 “나는 기도한지 오래되었다.”) * 祇(기)/ 토지의 신 “祈禱(기도)”라는 글자를 풀이하면 제단위에 도끼 올려놓음이 祈요 제단위에 목숨 올려놓음이 禱이다.

도끼는 戰士에게는 생명을 지키는 武器이다. 이 도끼와 목숨을 제단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신께 의탁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을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늘의 뜻을 받겠다는 것이다. 기도의 순수한 우리말이 ‘비나리’이다. ‘비나리’에는 두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나를 비우는 것으로서의 비나리 이고 또 하나는 간절히 바라는 것으로서의 비나리 이다.

기도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을 수 없다. 간절하고 절실하면 기도이다. 근심과 걱정도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도 기도요 내 뜻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도 기도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도 기도요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는 것도 기도다.

공자는 “敬鬼神而遠之(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라)”가 지혜라고 하였다.(옹야 20장) 신을 공경하되 너무 가까이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미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한 공자가 자신을 병을 고쳐달라고 신에게 빌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살든 죽든 하늘의 뜻에 순종하리니 하늘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내가 할 일이 남았다면 하늘은 나를 죽게 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이 앞에서도 의연했듯이 고통스런 질병 앞에서도 의연했을 것이다.

仁顔淵 22장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 (번지가 인을 묻자 “사람 사랑하는 것이다.”, 번지가 知를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고 했다. 仁은 한마디로 “사람 사랑하는 것”이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또 미워할 수 있다”(唯仁者能好人, 能惡人.) 이인 3장 고 했다. “진실로 인자함에 뜻을 둔다면 악(미움)이 없다.”)  (苟志於仁矣, 無惡也.)이인 4장 고 했다.

어떤이가 공자에게 묻기를 “덕으로 원수를 갚으면 어떠합니까?” 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러면 덕은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원수는 곧음(正義)으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아야 한다.”)「以德報怨, 何如? 」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 憲問(헌문) 36장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하셨는데 유가 경전에는 어디에도 “원수를 사랑하라”와 같은 가르침이 없다. 오히려 원수는 끝까지 쫓아가서 갚고야 마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서 유교문화에 익숙한 우리나라에서도 옛 이야기들 중에는 원수 갚는 이야기가 많다. 以德報怨(덕으로서 원수를 갚는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일 것인데 공자께는 그 말을 거부한다. 마땅히 정의로서 죄 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의 대가를 묻지 않고 용서한다는 것은 正義롭지 못한 것이고 불합리한 것이다.

정치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君君, 臣臣, 父父, 子子. 」 (顔淵 11장) 라 했다.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까? 大學에서는 말하기를 “갓난아이 보호하듯 하라.(如保赤子)”고 했다. 즉 자애로운 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안연 7장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 曰: 「去兵. 」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 왈 “식량을 풍족히, 병사를 풍족히, 백성의 신의가 있어야 한다.” 자공 왈 “부득이하여 하나를 버린다면 세가지중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 왈 “병사를 버려라” 자공 왈 “부득이 하여 하나를 버린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 왈 “식량을 버려라. 옛 부터 죽음이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만 백성이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수 없다.”)

나라를 다스림에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국방, 경제, 信(군주와 백성간의 신뢰)이다. 셋 다 꼭 필요하지만 이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공자는 信을 들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信보다는 法이 더 중요할 것 같다. 그러나 공자가 법을 이야기 하지 않고 信을 이야기 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보면 信이 제도화된 것이 法이다. 법은 질서유지를 위한 구성원 모두의 약속이다.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 한 그 사회는 유지된다. 그러나 법이 단지 질서유지의 수단이라면 그 사회는 원시사회이다. 법은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 상식에 부합하는 법이 시행되는 사회가 근대사회이다. 그러나 법이 상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법은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로운 법집행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복지사회다.

어느 시대든지 법은 강자가 만든다. 강자가 만들기에 강자에게 유리하다. 법의 목적은 정의 구현이 아니라 질서유지임이 분명하다. 질서유지란 미래지향적이 아닌 현 체제 유지이다. 그래서 법은 항상 보수적이다. 법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재산을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법은 빈부의 차를 제도적으로 정당화 하는 것이다. 법은 강자가 만들고 또 보수적이기에 법 스스로 발전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끊임없는 투쟁을 통하여 법은 상식화 되고 조금씩 정의로워 질 수 있다. 이러한 법의 한계성 때문에 공자는 법을 이야기 하지 않고 법의 근거가 되는 信을 이야기한다. 經濟 “나라나 가문을 가지고 있는 자는 그 적은 것을 염려하지 않고 균등치 못함을 염려하며, 가난한 것을 염려하지 않고 불안한 것을 염려한다. 대개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평화하면 적지 않고, 안정되면 기울지 않는다.”

- 論語 계씨 1장- 맹헌자가 말했다. 馬乘(네마리가 끄는 마차)을 기르는 이는 닭이나 돼지 따위를 살피지 아니하고 얼음을 베어 갈 정도의 집안은 소나 양을 기르지 아니하며 백승의 집안에서는 취렴하는 가신을 두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재벌은 골목상권까지...) 취렴하는 가신을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가신을 두는게 더 낫다. 이것을 일러 ‘나라는 이익으로써 이로움을 삼지 아니하고 의로써 이로움을 삼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의 어른이 되어 재화에만 힘쓴다면 그것은 반드시 소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소인들에게 국가를 다스리게 하면 재앙과 피해가 아울러 이를 것이다. 비록 선한 이가 있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도다! 이것을 일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는 이익으로서 이로움을 삼지 아니하고 의로움으로써 이로움을 삼아야 한다.” (대학 10장) 禮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수 없다.󰡔不學禮, 無以立.

󰡕계씨 13장 팔일 15장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 子聞之曰: 「是禮也. 」 (공자가 대묘에 들어가서는 매사에 물었다. 이에 어떤 이는 “누가 매사에 묻는 추인의 아들(공자)이 예를 안다고 하였는가?” 하였다. 공자께서 듣고 하시는 말씀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예다” 하였다.) 태백 2장 「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 (공자왈 “공손하면서도 예가 없으면 고생이다. 신중하면서도 예가없으면 두려워하는 것이다. 용감하면서도 예가 없으면 난폭한 것이다. 곧으면서도 예가 없으면 박절한 것이다.) 성군과 폭군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하들에게 예가 있으면 성군이요 예가 없으면 폭군이다. 정적을 제거함에도 예를 지켜 제거하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지만 예를 무시하며 행하면 폭군이란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안연 1장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 顔淵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공자 왈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 안연 왈 “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 기독교적 예의 필요성 예를 갖추어서 절하는 것이 예배(禮拜)다. 불교는 수십 번, 수백 번 절을 한다.

유교도 절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있으며 이슬람교 또한 하루에도 여러 번 씩 절을 한다. 기독교는 절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무릎을 꿇는다. 오늘날 입식생활이 보편화 되면서 기독교에서는 무릎을 꿇는 기회마저 거의 사라지고 있다. 무릎을 꿇을 기회가 없음에 마음도 멀어진다. 기도할 때에 두 손 모으는(합장) 모습도 사라진다.

불교인들이 합장하는 것과 모양이 같기에 무의식중에 그것을 꺼려서일 것이다. 절하지 않고 무릎 꿇지도 않고 합장하지도 않는 기독교인에게 외적인 경건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사용하는 언어와 일상의 삶 속에서 경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언어 예절과 삶의 예절이 절실히 필요하다.

예란 무엇인가? 1. 예는 법이 아니다. 형식적인 예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유가의 제례 또한 법이 아니다. 법이라면 어디나 같은 규칙과 절차가 있어야 할 터인데 지방마다 다르고 가문마다 다르며 祭主마다 다르다. 그래서 祭法이 아니라 祭禮다. 유일한 법이 있다면 정성을 다하는 것이 법일 것이다.

2. 예는 표현이다. 10명의 문둥병자가 병 고침을 받았다(눅17:15-16). 그 중 한사람만 돌아와서 감사했다. 감사의 우리말은 “고마움”이다. 베푸신 은혜가 크니 그만하라는 뜻이다.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예(禮)다. 아홉 명의 병 고침 받은 문둥병자들도 마음으로는 크게 감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표현하지 않았다. 표현하지 않았기에 무례(無禮)다. 감사를 표현한 한 사람을 칭찬할 일은 아니다. 그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사람다울 수 있다. 사례한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했다.

예를 모르는 천민과 같이 여겨지는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 예를 행했다. 예는 신분이나 혈통, 학문의 정도와는 관계가 없다. 문화의 차이도 관계없다. 진실한 마음으로 행할 것을 행하고 표할 것은 표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예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요8:4-7). 현장에서 잡혔으면 그 현장에 남자도 있었을 것인데 남자 이야기는 없다. 남자에게는 처음부터 죄를 묻지 않았던지 아니면 도망할 기회를 주고 여자만 잡아왔을 것이다.

그 여인에게 죄가 있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 또한 관례다. 그 여인을 잡아온 것은 요즈음 말로 한다면 표적수사다. 그 여인을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인을 이용해서 예수를 옭아매려는 수작이다.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했을 때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렸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사람다운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여인을 돌로 치려고 돌을 들고 서 있었지만 찝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지적이 있자 수오지심(羞惡之心)이 발하여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를 돌아본 것이다. 어른들부터 차례로 돌아갔다고 했다. 역시 어른이다. 나이를 헛먹은 것이 아니다. 나이 먹은 만큼 자신을 돌아볼 줄 안 것이다. 사람들이 이 정도라면 소망이 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예다. 자신의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수 있는 것이 예다. 비굴한 것은 예가 아니다.

서양 속담에 “부자들의 농담은 항상 웃음꽃을 피운다”했다. 그 웃음들은 아첨하는 웃음들입니다. 사람을 알아봄이 예이다. 예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물건에는 價格(가격)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人格(인격)이 있다. 인격이 사람의 값이다. 옛 사람들은 사람의 값을 정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값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신분과 외모, 재산의 정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품으로 저절로 정해졌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신분 등에 의하여 사람을 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사람을 보려면 인품에 의하여 형성된 인격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려면 보는 이의 인격이 그만 해야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나타난 나그네 세 사람을 보고 그들이 예사 사람들이 아님을 단박에 알고는 지극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했다.(창18장) 사람을 알아보기는 롯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의 천사 둘이 소돔에 다다랐을 때 롯은 그들을 알아보고는 역시 지극한 정성으로 영접하였다.(창19장)

소돔성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으니 오히려 그들에게 행패를 부리려고 롯을 협박하였다. 소돔성 사람들도 두 나그네가 천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정성껏 그들을 대하였겠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떠돌이 나그네로만 보였을 뿐이다. 소경이 따로 없습니다. 사람을 그의 격에 맞게 알아보지 못하니 격에 맞게 대할 수도 없는 무례를 범한다.

예와 비례의 혼동 때때로 예인지 비례인지 혼동되는 때가 있다. 옛날 어느 부족은 귀한 손님에게는 자기의 아내를 주는 것이 예인 경우가 있었는데 그들의 문화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을 남성들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원시적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와 비슷한 것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서 볼 수 있다. 롯은 자신의 손님인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들을 소돔사람들에게 내어 주려고 한다. 천사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뜻은 갸륵하되 그의 딸들을 희생코자 함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롯은 그의 딸들을 그의 소유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가능했을 것이다.(창19:7-8)

롯은 천사들에게는 예를 지켰으되 똑같은 인격적인 존재인 자신의 딸들에게는 못할짓을 한 것이다. 결코 예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자녀를 신에게 재물로 바치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각각의 경우는 다르지만 아브라함이 그랬고 사사 입다가 그러했고 남유다의 왕 므나쎄가 그리하였다.

지나친 친절은 非禮(비례)다. 나는 서민이라 그러한지 과도한 친절을 받을 때는 몹시 불편하다. 내자가 불편함을 느끼는 친절이라면 적어도 나에게는 비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혹 고위층 인사나 큰 부자 중에 과도한 친절에 익숙하여 그것이 편안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왜곡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신분제도는 사라졌으되 권력과 부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특별한 대접을 받는 이들이 있는 이상 세상은 실질적 신분사회다. 서양 민주주의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앙고백이 법과 제도로 발전해 왔다. 기독교인은 마땅히 그러한 평등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에 사람과 사람을 계층화 하는 과도한 친절은 거부해야 할 것이다. 불의 한 것은 예를 말할 수 없다.

불의한 것은 예를 갖춘다고 하면 할 수록 그것은 가증한 것이된다. 예는 정의에 바탕할 때 의미가 있다. 오랜 세월동안 유가의 예(禮)는 매우 형식화 되었다. 그래서 유가의 예를 지키는 것이 매우 어렵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되었다. 유대교의 안식일 법도 형식화 되었다. 참으로 좋은 법이되 형식화되자 사람을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 법을 파기 하셨다.

그 시대의 형식적인 예를 중시하던 사람들의 시각으로 볼 때는 예수님은 참으로 천박한분이다.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무례한 분이다. 신성한 성전에서 행패를 부리셨다. 예수께서는 형식보다 기본에 충실하시고 원칙에 충실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무례하고 천박하게 보일 수 있었다. 예는 자연스럽고 편리한 것 형식화 된 예는 어렵고 불편할 수 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그래서 매우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이 예다. 예는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야곱이 이집트의 파라오 앞에 섰습다(창47장). 평생을 목자로 살아온 야곱이다. 특별히 벼슬을 한 적도 없고 학문을 한 적도 없이 억척스럽게 살아온 인생이다. 왕 앞에서의 예법을 알 리 없으되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은 결례함이 없었다. 진리라는 것이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주어져 있듯이 예도 그러하다. 배워서 아는 것은 예(例)일 뿐 이다.

무례한 것의 근거는 교만함이다. 교만은 어떠한 형태로든 무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또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영적 교만함은 영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요 육체의 교만함은 육체적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며 물질적 교만함은 역시 물질로 대가를 치러야 하고 지적 교만함은 역시 지적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고 자라서 그런지 매우 오만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더라는 그의 꿈 이야기가 그러하고 형님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로 팔려가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런 그가 이집트로 팔려가서는 참으로 예의 바른 사람으로 바뀌었다. 예를 배워서가 아니고 의 가치관이 바뀐 까닭이다. 허례허식 형편과 처지에서 넘치는 것은 예가 아니다. 본인에게는 큰 부담이요 상대에게도 결코 편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허세라면 보는 이들의 빈축을 살 것이요 진심이라면 크게 부담스러운 것이니 예가 아니다. 가난한 자는 그 가난한 형편과 처지대로 예를 행하면 된다.

공자와 노자, 그리고 나

자한 12장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 (자공 왈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상자 속에 감추어 둠이 옳은가요 아니면 좋은 값을 줄 사람을 찾아서 팔아야 할까요” 공자 왈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 韞匵(온독/ 궤에 감추다), 沽(고/ 팔다) 시골목회를 할 때였다. 할머니 교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할머니가 자식이 사준 옷 자랑을 하자 다른 할머니가 “입지도 않고 장롱 속에 처박아 둘 것이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한다. 그러자 그 할머니 왈 “그래도 좋은걸” 한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보물은 감추어 두는데 묘미가 있다.” “꽃은 두고 보기만 해야 한다. 소유하려고 꺾으면 죽어 버린다.” “아름다운 여인도 보기만 해야 한다. 품으면 사라진다.”, “지극한 선도 감추어 두어야 한다. 까발리면 사라진다.” 훗날에 보니 노자가 그런 말을 했다. 공자가 노자에게 禮에 관하여 물으니 노자 답하기를 “훌륭한 상인은 상품을 깊숙한데 갈무리해 두고 가게 진열장에 벌려 놓지 않아 언뜻 보아 빈 것처럼 보인다.” 했다.

그러나 흥미 있는 말이지만 한편 허전하다. 이러한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도 보지 않는 아름다움, 남이 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보물, 드러나지 않은 선, 써먹을 데 없는 재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껏해야 자기 위안이 아닐 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 까지 이러한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나의 지식과 나의 학문 쌓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까 아니면 사용해야 의미가 있을까?.

공자는 당연히 둘 다를 선택한다. 그래서 유가의 대 학자들은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서 현실정치에 참여하고 물러나서는 후학을 양성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입신양명이 인생의 목적일까? 입신양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학문이 아무리 뛰어나고 그 인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는 것일까? 곧은 낚시하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결국 때를 얻은 강태공은 입신양명 했지만 때를 얻지 못하고 사라져간 수많은 강태공들은 헛된 삶을 산 것일까? 그저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노여워하지 않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안 삼아야 하는 것일까?

공자선생님은 자신을 등용할 대인을 기다리고 있다. 하물며 속물인 필자는 기다리다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 등용되지 못한 이름 없는 강태공으로 평생을 살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자신을 사줄 대인을 기다리는 공자와 자신을 등용하고자 찾아온 유비를 빈손으로 돌려보낸 재갈공명을 비교해 본다. 언뜻 보면 공자는 등용되지 못하여 안달하는 소인이요 재갈공명은 당당한 대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재갈공명은 참으로 영악한 사람이다. 저 자신도 필경은 등용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자신의 값을 최대한 높이려는 고도의 술책이다. 당시 군웅할거의 시대에 자신 정도의 인재라면 누구도 탐을 내는 인재라는 것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공자의 사람됨이 너무 커서 그를 등용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헌문 41장 子擊磬於衛.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 曰: 「有心哉! 擊磬乎! 」旣而曰: 「鄙哉! 硜硜乎! 莫己知也, 斯己而已矣. 深則厲, 淺則揭. 」 子曰: 「果哉! 末之難矣. 」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경쇠를 치는데 삼태기를 짊어지고 공자의 집 앞을 지나는 자가 왈 “경쇠를 치는 소리에 마음을 담았구나!” 또 이르되 “천박하구나 돌맹이 부딪히는 소리!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둘 따름이다.

물이 깊으면 옷을 벗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면 되는 것을···” 공자 왈 “대단한 것 같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 磬(경/ 옥이나 돌로 만든 타악기), 荷蕢(하괴/ 삼태기를 메다.), 鄙哉(비재/천박하다.), 硜硜乎(갱갱호/ 돌맹이 부딪히는 소리.), 斯己而已矣(사기이이의/ ~면 그만일 따름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는 사람” 공자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공자의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다.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 이면서도 이상주의자 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기에 꿈을 먹고 사는 이상주의자이다. 꿈을 먹고 살기에 공자는 항상 젊은이다. 반면 노장은 안 되는 줄 알면 진작에 그만두니 이상주의자 같지만 사실은 현실주의자이다. “털 하나를 뽑아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拔一毛而利天下不爲)” 라고 하는, 조금도 손해 볼 짓을 하지 않는 楊朱(양주/ 초기의 도가철학자로 爲我主義者)의 모습에서 그들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안될 줄을 지레짐작하고 미리 포기하니 진취성을 잃은 늙은이다. 어찌 안 될 줄을 알았을까? 권력다툼에서 번번이 실패했으니 거기에 익숙해졌다. 왜 권력다툼에서 실패했을까? 어쩌면 본래 이기적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세상은 참 영악하다. 이기적인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다. 적어도 이타적인 척이라도 해야 등용한다. * 楊朱(양주/ BC 440~360(?). 중국 전국시대(BC 475~221) 초기의 도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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